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종로 한 의원 입구. 수십 명이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병원은 저렴한 가격에 탈모약 처방을 해준다고 널리 소문이 난 곳이다. 이곳에서 만난 대학생 황모(23)씨는 "지난해 비만 치료제를 맞고 10㎏쯤 감량했는데 이후 탈모 증상이 심해져 약을 처방 받으러 왔다"면서 "또래 친구들 중에서 급격한 다이어트 후 탈모 증상으로 병원을 찾는 경우를 종종 봤다"고 했다.
'위고비' '마운자로' 같은 GLP-1(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1) 계열의 비만 치료제가 큰 인기를 끌면서 뜻밖에도 탈모 치료제 시장과 헤어케어 시장이 웃고 있다. 단기간에 체중을 빠르게 감량하는 이들 중 탈모 증상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들을 위한 치료제 및 두피 관리 시장이 급격히 성장하고 있어서다.
비만 치료제로 살을 뺀 뒤 머리카락이 빠지는 현상을 일컬어 '오젬픽 헤어' '위고비 헤어'라는 말도 생겼다. 오젬픽과 위고비는 덴마크 제약사 노보 노디스크가 판매하는 당뇨·비만 치료제 이름이다.
◇살 빠지니 毛도 빠진다… 남몰래 웃는 탈모 시장
갑자기 살을 급격하게 빼면 영양 부족과 신체 스트레스로 인해 이른바 '휴지기 탈모'가 오기 쉽다. 체중이 단기간에 10% 이상 줄면 모낭이 휴지기에 들어가 모발이 더 많이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여성형 탈모 환자도 이 과정에서 급격히 늘어난다. 비만 치료제 열풍으로 남성형 탈모만큼이나 여성형 탈모, 청년형 탈모가 늘어나는 이유다.
여성형 탈모약으로 널리 알려진 미녹시딜 등을 판매하는 동성제약의 지난 1분기 탈모약 매출은 작년 같은 기간보다 40% 증가한 27억원을 기록했다. 전체 매출에서 탈모약이 차지하는 비율도 같은 기간 7%에서 14%로 늘었다.
관련 제품 판매도 늘어나고 있다. 이해신 KAIST 화학과 석좌교수가 운영하는 교원 창업 기업인 폴리페놀팩토리는 지난달 8일 신제품 탈모 샴푸 '그래비티 PDRN 리커버리 샴푸'를 출시했다. PDRN(폴리데옥시리보뉴클레오타이드)은 세포 재생 및 손상된 조직 회복에 도움을 주는 성분이다.
이해신 교수팀은 이 PDRN 성분을 제주 바다 해양 미세조류에서 추출했고, 이 성분이 머리를 감는 과정에서 물에 쉽게 씻겨 내려가지 않도록 물과 섞이지 않는 특수한 수용액 상태인 '코아세르베이트' 기술을 적용했다.
회사 측은 "제품 개발 단계부터 비만치료제로 살을 뺀 뒤 '오젬픽 헤어'를 겪는 청년층 고객을 겨냥했다"면서 "지금까지 기존 제품을 포함해 누적 210만병이 팔렸다. 올해 300만병 판매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다.
◇해외서도 'K두피 관리' 인기
오젬픽 헤어 현상이 확산되면서 해외에선 이른바 'K두피 관리'가 새롭게 유행하고 있기도 하다. 지난 달 16일(현지 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최근 미국에선 GLP-1 계열의 체중감량제 약물 확산으로 인한 각종 두피 관리 헤어스파 등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K-뷰티 영향을 받은 제품이 많이 팔리는 추세다.
가령 미국 캘리포니아에 매장을 연 우리나라 뷰티 매장 올리브영에선 두피 토너, 앰플, 각질 제거 제품 등이 베스트셀러 제품군에 이름을 올렸다. 올리브영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담당인 레나 김은 WSJ 인터뷰에서 "매장에서 두피 진단 서비스를 받고 관련 제품을 사는 고객이 계속 늘고 있다"고 했다.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 서카나에 따르면, 미국에서 GLP-1 비만 치료제를 사용하는 가구는 그렇지 않은 가구보다 뷰티 제품에 30% 가까이 많은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탈모 분야 성장세가 두드러진다. 가정용 모발 성장 제품, 두피 세럼, 영양 보충제가 널리 팔린다. 온라인 뷰티 플랫폼 덤스토어에서도 올해 상반기 두피 관리 제품 판매량은 전년 같은 기간의 두 배 가량으로 늘어났다. 두피 관리 제품을 판매하는 '케라팩터'도 올해 상반기 매출이 전년 대비 100% 성장했다. 이 회사 최고운영책임자인 로렌 바르톨로메우스는 "최근 비만 치료제 인기로 회사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