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게릭병으로 목소리조차 내기 어려웠던 남성이 집에서 가족들과 분당 56단어 속도로 대화를 나눴다. 일반적인 회화보다는 느리지만, 실시간 대화가 가능한 속도로 의사를 전달한 것이다. 이는 병원 임상 시험 단계에 머물렀던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rain-Computer Interface·BCI)' 기술이 가정으로 들어온 덕분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UC 데이비스 의료진은 루게릭병을 앓아온 47세 남성 케이시 해럴(Harrell)의 BCI 활용 사례를 국제학술지 '네이처 메디슨'에 최근 공개했다. 해럴은 집에서 의료진 도움 없이 BCI 기술을 사용해 가족들과 성공적으로 2년 가까이 의사소통을 해왔다. BCI가 장기간 가정에서 쓰일 수 있는 현실의 기술임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기술, 이젠 집에서 누린다
해럴이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것은 2020년이다. 병이 진행되면서 해럴의 팔다리는 서서히 굳었고 언어 능력도 퇴화되어 갔다. 하고 싶은 말이 머릿속에 빙빙 맴돌았지만, 입 밖으로 소리를 내기도 쉽지 않았다.
의료진은 2023년 해럴의 뇌에 미세 전극 장치를 이식하는 BCI 수술을 진행했다. 환자가 말을 하려고 할 때 발생하는 뇌 신호를 머릿속 장치와 연결된 컴퓨터와 인공지능(AI)이 실시간으로 해독해 문자로 변환하는 기술이다. 연구진은 해럴이 루게릭병에 걸리기 전 녹음했던 목소리를 AI에 학습시켜, 뇌 신호로 만든 문장을 해럴의 실제 목소리와 유사한 음성으로 들려주는 기능까지 구현했다. 덕분에 해럴은 말하려는 뇌 신호만으로 문장을 만들고, 이를 자신의 목소리와 비슷한 음성으로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BCI 사용법도 간단했다. 머리에 이식된 장치와 컴퓨터를 가족이 연결해주면, 이후에는 해럴이 혼자 시스템을 작동해 일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었다. BCI는 해럴이 말하려는 내용을 분당 최대 56단어의 속도로 음성으로 변환했다. 말하려는 단어를 정확히 해독한 비율은 92%에 달했다. 의료진은 19개월 동안 해럴이 18만개의 문장, 196만개의 단어를 말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BCI 기술은 해럴에게 사회적 활동도 되찾아주었다. 투병하기 전에 해럴은 기후 환경 운동가이자 장애인 인권 활동가로 활약했다. 그는 현재 그 일을 다시 하고 있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문자메시지와 이메일을 보내고 화상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된 덕분이다. 해럴은 "BCI 기술을 통해 계속 일하고 돈을 벌 수 있게 됐다"며 "일곱 살 딸에게 내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고 아내와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고 했다.
◇생각만으로 조명 끄고 TV 켜고… 일상으로 파고드는 BCI
BCI의 활용 범위는 스마트폰과 가전제품 조작으로 넓어지고 있다.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60대 환자 마크 잭슨(Jackson)은 2024년 무렵 미국 스타트업 '싱크론'이 개발한 BCI 장치를 이식하는 수술을 받았다. 2025년 싱크론의 BCI 시스템이 애플의 아이폰과 아마존의 스마트홈 플랫폼 등과 연동되면서 그의 일상은 획기적으로 변했다.
잭슨은 이제 생각만으로 거실 조명을 끄고 TV 채널을 돌릴 수 있다.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고도 아이폰을 조작하고 소셜미디어 댓글도 단다. 싱크론에 따르면 2025년 말까지 잭슨처럼 BCI 칩을 이식받은 환자는 총 12명에 이른다.
일론 머스크가 설립한 BCI 기업 '뉴럴링크'도 올해 안에 중증 마비 환자들을 대상으로 BCI 기기 보급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2032년까지 연간 2만명에게 BCI 기기를 이식해 환자들이 집에서 일상을 누리게 한다는 구상이다.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 스트레이츠 리서치에 따르면, 전 세계 BCI 기기 시장 규모는 2024년 21억달러(약 3조2000억원)에서 2030년 48억달러(약 7조3000억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