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에서 오타 하나를 고치는 일은 쉽다. 하지만 그 책이 앞으로 태어날 한 사람의 설계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고친 글자 하나가 평생의 건강을 좌우할 수도 있고, 잘못 건드린 글자 하나가 돌이킬 수 없는 문제를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 컬럼비아대, 서울대, 기초과학연구원(IBS) 등 국제 공동연구팀은 인간 배아의 DNA에서 염기 하나를 정밀하게 바꾸는 데 성공했다고 지난 1일(현지 시각) 논문 사전 공개 사이트 '바이오아카이브'에 공개했다.
DNA는 A·G·C·T 네 글자로 쓰인 생명의 설계도에 비유된다. 각각 아데닌(A), 구아닌(G), 시토신(C), 티민(T)이라는 염기를 뜻한다. 이 네 글자의 배열 순서가 달라지면 단백질을 만드는 방식이 달라지고, 그 결과 눈 색깔과 키를 비롯해 신체 특성이나 질병 위험이 달라진다.
연구팀은 수정란과 초기 인간 배아에서 질병과 관련된 유전자 세 곳을 골라 A 염기를 G 염기로 바꿨다. 하나는 혈중 '나쁜 콜레스테롤(LDL)' 조절에 관여하는 PCSK9 유전자다. 이 유전자의 특정 염기를 바꾸면 PCSK9 기능이 약해져 LDL 수치와 심장병 위험을 낮추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다른 표적은 태아 헤모글로빈 생성에 관여하는 HBG1, HBG2 유전자였다. 연구팀은 이 유전자에서도 A를 G로 바꿔, 성인이 되면 꺼지는 '태아용 헤모글로빈 스위치'를 다시 켜는 효과를 노렸다. 태아 헤모글로빈이 늘면 겸상적혈구병이나 지중해빈혈 증상이 완화될 수 있다.
기존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DNA의 특정 부위를 잘라낸 뒤 고치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고치려던 곳 주변의 DNA까지 망가질 수 있었다. 반면 이번 염기 교정은 DNA를 자르지 않고 염기 하나만 바꾸는 방식이어서 이런 손상 위험이 상대적으로 적다. 문장을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빨간펜으로 오타 한 글자를 고치는 기술인 셈이다.
연구팀은 실제로 염기 교정을 거친 배아에서 DNA가 크게 잘려 나가거나 목표로 삼은 염색체가 손상되는 현상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염기 교정을 거친 일부 배아가 착상 직전 단계까지 정상적으로 자라는 것도 확인했다. 기존 크리스퍼 방식의 약점으로 지적돼 온 대규모 DNA 손상 위험을 줄일 가능성을 보인 것이다.
이번 연구에 대해서는 상반된 반응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유전 질환을 배아 단계에서 미리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평가한다. 예컨대 체외 수정 과정에서 유전 질환을 가진 배아를 버리는 대신, 문제 되는 염기 하나를 고쳐 건강한 아이로 태어나게 할 수 있다는 기대다.
반면 이 기술이 더 똑똑한 아이, 키 큰 아이 등 이른바 '수퍼 베이비'를 골라 낳는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연구에는 배아 유전자 검사 기업 관계자도 공동 저자로 참여했다.
네이처는 이번 연구의 주요 저자가 '뉴클리어스 지노믹스'와 협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 회사가 배아의 질병 위험뿐 아니라 키와 지능 같은 특성을 예측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배아 선별이 배아 편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 회사는 지난해 "최고의 아기를 낳으라"는 취지의 광고를 내걸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이미 미국의 체외수정(시험관 아기 시술) 시장에서는 배아의 질병 위험을 넘어 키와 지능지수(IQ) 같은 특성까지 예측하려는 서비스가 등장했다. 유전병 예방을 위한 기술이 '더 나은 아기'를 고르는 시장으로 번질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판 우생학' 논란이 커지고 있다.
물론 지능이나 키 같은 특성은 유전자 하나로 결정되지 않는다. 수백, 수천 개 유전자와 환경이 얽혀 있다. 염기 몇 개를 바꾼다고 지능이나 외모를 마음대로 설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기술이 고도화되면 공상과학 영화 '가타카'처럼 태어나기도 전에 유전자 정보를 기반으로 아기 특성을 예측하거나 특정 질병 위험을 낮추는 일이 가능해질 수 있다.
앞서 2018년 중국 과학자 허젠쿠이는 크리스퍼 기술로 인간 배아 유전자를 편집한 뒤 실제 아이를 태어나게 했다고 발표해 생명 윤리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중국에서 불법 의료 행위로 복역했다. 이번 연구는 그때보다 훨씬 조심스럽다. 연구팀은 배아를 임신으로 이어지게 하지 않았고, 임상 적용 가능성보다 인간 배아에서 DNA 교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확인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럼에도 아직 넘어야 할 장벽은 높다. 연구팀은 이번 실험에서 염기 교정이 배아의 모든 세포에서 똑같이 일어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어떤 세포는 원하는 대로 바뀌었지만, 어떤 세포는 원래 상태로 남았다. 이른바 '모자이크 현상'이다. 한 권의 책 안에 수정본과 원본이 함께 섞인 셈이다. 이런 배아가 아이로 태어나면 유전자가 고쳐진 세포와 고쳐지지 않은 세포가 한 몸 안에 공존할 수 있다는 얘기다.
빨간펜이 오타만 고친 것도 아니었다. PCSK9 유전자에서는 비교적 목표한 염기만 잘 바뀌었지만, HBG1·HBG2 유전자 실험에서는 목표 부위 주변의 다른 염기까지 일부 함께 바뀌는 현상이 나타났다. 원하는 곳만 정확히 고치는 기술로 만들려면 더 많은 검증이 필요하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