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9일 서울 서초구 제약바이오협회 SDL 연구실에서 표준희 AI신약연구원장(오른쪽)이 로봇팔이 실험을 진행하는 모습을 기자에게 설명하고 있다. /고운호 기자

로봇 팔 하나가 손가락만 한 유리병(바이알)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위치를 가늠하듯 잠시 멈췄다가, 뚜껑 부분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로봇 팔 대신 유리병을 고정한 바닥이 돌아가기 시작하더니 뚜껑이 열렸다. 로봇은 가루 시약을 0.005밀리그램 단위로 떨어뜨리고, 전자저울로 무게를 재고, 액체 용매를 흔들어 섞었다. 사람 연구원이 개입하지 않고도 실험은 멈추지 않았다.

지난달 29일 서울 서초구 한국제약바이오협회 AI신약연구원의 '자율 실험실'(SDL·Self-Driving Lab)에서 진행된 모의 실험 장면이다. SDL은 인공지능(AI)이 실험을 설계하고, 로봇이 실험을 수행하면, 다시 AI가 결과를 분석해 실험을 이어가는 연구 시스템이다. AI가 '머리', 로봇이 '손' 역할을 맡는다. 사람 없이 불을 꺼둔 채 밤새 실험을 돌린다는 뜻에서 '다크 랩'이라고도 불린다. 협회는 지난해 10월 개소해 이달 본격 가동을 앞두고 자율 실험실을 처음 언론에 공개했다. 협회 관계자는 "반도체 소재 개발이나 촉매 반응 연구 등에 AI를 활용하는 실험 환경은 있지만, 실제 AI 신약 개발을 수행할 수 있는 SDL로는 국내 최초"라고 했다.

지난달 29일 서울 서초구 한국제약바이오협회 AI신약연구원 자율 실험실에서 AI 자동화 로봇이 모의 제약 실험을 하고 있다. /고운호 기자

◇장비 하나에 7억원… 핵심은 정밀 공정

SDL 원리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건 색상 배합 실습 장비다. AI에 목표 색을 정해주면 로봇이 빨강·파랑·노랑 물감을 섞어가며 그 색을 찾아간다. 카메라 센서가 결과 색을 찍어 데이터로 저장하면, AI가 목표 색과의 차이를 계산해 다음에 더할 색을 조정한다. 이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면 목표 색에 도달한다. 표준희 AI신약연구원장은 "물감 대신 용매 농도나 합성 온도·압력을 변수로 두면 곧바로 실제 신약 개발 실험이 된다"고 했다. 신약 개발 라인에서는 로봇이 용매와 시약을 정밀하게 계량해 합성 반응을 일으키고, 용량·온도·압력을 바꿔가며 원하는 물질을 얻을 때까지 실험을 반복한다.

AI에 목표 색을 정해주면 로봇이 빨강·파랑·노랑 물감을 섞어가며 수차례 반복을 통해 목표 색을 찾아간다. / 고운호 기자

고도의 정밀 공정이 들어가는 만큼 장비도 고가다. 국내에 1대뿐이라는 자동화 리액터(합성 반응기)는 7억원이 넘고, 0.001밀리그램까지 잡아내는 초정밀 계측 장비도 1억원 수준이다. 실험실 전체 구축에는 약 25억원이 들었다.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AI 활용 신약 개발 교육·홍보' 사업 지원을 받았다.

SDL은 사람 없이도 실험을 이어가고, 규모를 키우면 자동화 공장처럼 운영할 수 있다. 실패 데이터까지 쌓는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 사람 연구자는 보통 성공한 실험만 기록하지만, SDL은 실패한 실험 데이터까지 전부 저장하고 분석한다. 이 데이터가 AI 모델을 고도화하는 결정적 자산이 된다.

5월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제약바이오협회관 연구실에서 AI 자동화 로봇을 통한 제약을 시연하고 있다. /고운호 기자

◇해외선 이미 신약 개발 속도 바꿔

해외에서 SDL은 이미 신약 개발의 모습을 바꾸고 있다. 일본 도쿄과학대 로보틱스 혁신센터는 지난 4월 로봇 10대가 두 팔로 액체를 다루고 세포를 배양하는 자동화 실험실을 열었다. 이곳에서 AI는 111일 동안 144개 실험 조건을 테스트해 인간 줄기세포 배양의 최적 조건을 찾아냈다. 연구원들이 휴가로 자리를 비운 기간에도 로봇이 세포 배양을 직접 관리했다.

SDL을 세계에 알린 대표 사례는 영국 리버풀대다. 로봇 팔이 8일 동안 688회 실험을 거쳐 물 분해 촉매를 찾아낸 성과로, 2020년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실렸다. 스위스 제약사 노바티스는 자체 SDL '마이크로사이클'로 신약 후보 물질의 합성·정제·분석을 하나의 자율 순환 시스템으로 통합해 실전에 투입했다. 시장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투워즈헬스케어는 AI에 기반한 실험실 자동화 시장이 2025년 35억4000만달러(약 5조3000억원)에서 2035년 192억3000만달러(약 28조8000억원)로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교육 거점에서 기업 공용 연구실로

협회는 이 실험실을 우선 AI 신약 인재 양성 거점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다음 달 온라인 이론 교육을 시작으로 워크숍을 열고, 오프라인 실습도 진행한다. 실제 SDL 실습과 연계한 교육은 사실상 처음이어서 신약 개발 현직자, 피지컬 AI 개발자 등 관심을 보이는 이가 많다고 한다. 올해 교육 목표 인원은 150명이다.

다음 단계는 기업과의 실제 신약 개발 협력이다. 특정 기업에 실험 환경을 제공하고, 일정 기간 실제 신약 개발 프로젝트를 함께 수행하는 방식이다. 표 원장은 "이미 몇몇 국내 제약 기업이 SDL 도입을 검토하며 로봇 팔을 사놓고 파일럿 테스트를 하고 있다"며 "기업이 원하는 프로젝트를 가져오면 실험실을 임대해 실제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