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경북 안동 한국건설기술연구원 하천실험센터. 왕복 6차로 도로 위로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빗물받이(도로 배수구)의 배수 용량을 넘기자 물은 순식간에 인도 높이까지 차올랐다. 지하 우수관(빗물 배수관)의 압력이 높아지자 맨홀 뚜껑도 들썩였다. 수십 초 만에 물기둥이 치솟으며 맨홀 뚜껑을 도로 위로 밀어 올렸다. 실제 재난 현장이 아니다. 도시가 물에 잠기는 순간을 재현하는 '홍수 리허설'이었다.
건설연이 21일부터 본격 가동한 '도시 홍수 파일럿 실험장'은 서울 강남 도심과 유사한 침수 환경을 실물 크기로 재현한 시설이다. 축구장 절반 규모인 약 3000㎡ 부지에 왕복 6차로 도로를 깔고, 보도와 빗물받이, 맨홀, 우수관을 설치했다. 지하에는 우수 저류 시설, 배수 터널, 배수 펌프장까지 넣었다. 비가 도로 위에서 어떻게 흐르고, 지하 배수관과 맨홀을 거쳐 어디서 역류하는지 한눈에 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강남 침수, 안동에서 재현
이 실험장은 서울 강남구 도로 설계 기준과 반포천 일대 지하 배수망을 참고해 실물 크기로 구현했다. 기존 홍수 연구가 하천 수위와 제방 붕괴를 보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이 시설은 빗물받이가 막히고 맨홀이 물에 떠밀리며 지하 공간으로 물이 들어가는 도심 침수 과정을 실험한다.
이런 시설이 필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2022년 8월 서울 강남 일대에 시간당 100㎜가 넘는 폭우가 쏟아지면서 도로와 차량, 지하철역이 물에 잠겼다. 이를 막으려면 유사한 조건에서 빗물받이 모양을 바꾸거나 배수 환경에 변화를 주며 침수 대책을 검증해야 한다. 김종민 건설연 전임연구원은 "강남역 사거리에 시간당 최대 175㎜가 내리는 폭우 환경을 재현할 수 있다"며 "다양한 조건에서 연구에 필요한 정량 데이터를 확보할 것"이라고 했다.
◇해외에선 이미 재난 실험 활발
해외에서도 '홍수 리허설' 연구는 활발하다. 영국 셰필드대의 'A/B 플룸'은 대표적인 도심 침수 연구로 꼽힌다. 지표면 아래 배수관을 깔고, 맨홀로 도로 위 물과 관로 속 물을 연결했다. 폭우 때 도로 위 얕은 물과 지하 배수관의 흐름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지 보는 장치다. 도시 배수의 핵심 원리를 정밀하게 검증하는 축소 실험장인 셈이다.
해안과 하천 방어 시설을 대형 수로에서 시험하는 시설도 있다. 네덜란드 델타레스의 '델타 플룸'은 길이 300m, 폭 5m, 깊이 7~9.5m 규모 수로에서 대형 파도와 흐름을 만들어 낸다. 제방과 사구, 방파제가 극한 파도에 버티는지 실제에 가까운 조건에서 시험한다. 영국 HR월링퍼드의 '패스트 플로 시설'은 물 100만L를 담은 75m 수로에서 최대 1m 파도와 초속 2m 이상의 흐름을 만들어 해안 구조물과 홍수 방어 기술을 검증한다.
안동 하천실험센터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대규모 홍수 실증 인프라다. 전체 부지는 19만3051㎡로 축구장 27개 규모에 달한다. 초당 최대 10㎥ 물을 공급해 인공 홍수를 만들 수 있다. 1초 만에 500mL 생수병 2만개를 채울 수 있는 수준이다. 최장 682m 실규모 수로에서는 제방이 무너지는 과정이나 강물이 둑을 넘어가는 상황을 시험한다. 여기에 도시 홍수 파일럿 실험장이 더해지면서 하천 범람부터 도심 침수까지 실험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게 됐다.
◇사후 대응에서 선제 예방으로
기후변화에 따른 홍수 위험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2019~2023년 홍수로 인한 연평균 재산 피해액은 6200억원에 달한다. 짧은 기간에 연평균 강수량의 절반 수준이 쏟아지는 집중호우도 늘고 있다.
이에 대응해 건설연은 실험장에서 확보한 데이터를 AI 홍수 예보와 도시 침수 예측 모델 고도화에 활용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홍수 대응은 실제 피해가 난 뒤 원인을 되짚는 경우가 많았다. 앞으로는 도로와 지하 배수망을 디지털 공간에 재현하고 실증 실험장에서 검증해 선제적으로 예방하는 방식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박선규 건설연 원장은 "실험을 통해 검증된 데이터가 국가 홍수 대응 정책과 제도 개선의 핵심 근거로 활용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