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벌 군체에서 여왕벌이 사라져도 사회가 곧바로 무너지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연구팀은 카리브해와 중앙아메리카에 사는 말벌류인 '열대 쌍살벌'의 군체를 분석한 결과를 국제 학술지 '동물행동학'에 25일 발표했다. 이 말벌류는 한 마리 여왕벌이 번식을 도맡지만, 다른 암컷 일벌도 번식 능력이 있어 다음 여왕 자리를 놓고 경쟁할 수 있다.
연구팀이 여왕벌을 제거하자 벌집은 곧바로 권력투쟁에 빠졌다. 암컷 벌들이 여왕 자리를 놓고 서로 물고 쏘기 시작했다. 평소 먹이를 구하던 벌들까지 일을 멈추고 싸움판에 뛰어들었다. 여왕벌이 사라진 뒤 24시간 안에 공격 행동은 10배 늘었고, 구성원 41%가 싸움에 참여했다.
하지만 벌집은 무너지지 않았다. 싸움에 끼지 않은 일부 벌들이 먹이를 구하고 애벌레를 돌보며 군체를 지켰기 때문이다. 특히 싸움으로 먹이를 구하는 벌이 줄자, 평소 일을 하지 않던 벌들이 대신 움직였다. 여왕벌 제거 뒤 먹이 활동에 나선 벌 중 69%는 이전에는 먹이 활동이 관찰되지 않았던 개체였다. 혼란 속에서도 필수 노동을 떠맡은 '숨은 일꾼'의 역할이 확인된 것이다.
이 벌들이 작거나 약해서 싸움을 피한 것도 아니었다. 연구팀은 벌들이 몸집이나 기존 서열에 따라 싸움에 나서고, 먹이 활동을 맡는 패턴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했다. 벌들의 역할이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행동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기존 말벌 연구는 승계 서열이 비교적 뚜렷한 종에 집중돼 있었다. 이런 종은 여왕벌이 사라지면 미리 정해진 2인자가 자리를 잇는 경우가 많다. 반면 열대 쌍살벌은 다수 암컷이 동시에 경쟁하는 방식이다. 연구진은 "일부가 권력 다툼을 벌이는 동안에도, 조용히 필수 노동을 책임진 개체들 덕분에 군체가 유지될 수 있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