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가 최근 양자 컴퓨터의 정확도와 안정성을 높이는 기술 '이징(Ising)'을 공개하면서 양자 기술 경쟁이 다시 달아오르고 있다. 그러나 양자컴 업계가 먼저 부딪히는 벽은 연산 능력보다 냉각이다. 양자칩을 절대 영도(영하 273.15도) 가까이 식히는 데 필요한 냉매인 '헬륨-3′가 개발 속도를 제한하는 핵심 요인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래픽=박상훈

◇헬륨-3 한 스푼에 3000만원까지도

구글, IBM 등이 개발하는 초전도 방식 양자 컴퓨터는 정보 처리 기본 단위인 큐비트(qubit)가 안정적으로 작동하려면 절대 영도에 근접하는 온도까지 냉각돼야 한다. 이런 극저온 환경을 만드는 표준 장비가 '희석 냉동기'다. 헬륨 혼합물을 극저온으로 냉각하면 두 기체가 분리되는데, 이때 헬륨-3가 희석되는 과정에서 주변 열을 흡수해 온도를 낮추는 원리다.

핀란드 기업 블루포스(Bluefors)가 이 분야 세계 선도 기업으로 꼽힌다. 희석 냉동기의 핵심 냉매는 헬륨-3다. 헬륨-3는 지구상에 극히 드문 물질로, 미국 에너지부(DOE)는 핵무기에 사용되는 삼중수소가 자연 붕괴하며 생기는 부산물에서 헬륨-3를 회수·분리해 판매한다. 러시아도 과거 주요 공급 축 가운데 하나였다. 이처럼 헬륨-3 공급은 사실상 핵무기 보유국에 의존하는 체제다. 헬륨-3는 2001년 이전에는 기체 1리터당 40~85달러 수준이었는데, 9·11 테러 이후 보안 검색용 수요가 급증하고 2009~2010년 공급 위기를 거치며 현재 최대 2만달러까지 올랐다.

1리터 헬륨-3를 액화시키면 1티스푼보다 적은 양에 불과하다. 예컨대 최고가 기준으로 10리터만 사용해도 20만달러가 들어 희석 냉동기 가격(60만달러 안팎)의 3분의 1에 육박할 수 있다. 양자컴이 대형화할수록 냉각 비용도 함께 불어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양자컴 상용화가 본격화할수록 헬륨-3 공급망도 불안해질 전망이다. 이에 미국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지난 1월 헬륨-3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극저온 냉각 기술 개발을 공모했다. DARPA는 이 기술이 "국방·상업 분야 모두에서 획기적 변혁"을 가져올 수 있다고 밝혔다. 차세대 양자·국방 기술의 전략 변수로 올라섰다는 의미다.

◇탈(脫)헬륨-3 경쟁

불안정한 헬륨-3 공급망을 대비해 블루포스는 미국 스타트업 인터룬과 계약을 맺고 2028~2037년 해마다 최대 1만리터의 헬륨-3를 달에서 공급받기로 했다. 인터룬은 달 표면에 매장된 헬륨-3를 채굴하겠다는 구상이다.

헬륨-3 의존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도 본격화하고 있다. 독일 스타트업 키우트라는 헬륨-3 없이 자기(磁氣) 냉각 방식으로 절대 영도에 가까운 초저온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고 최근 밝혔다. 이를 양자컴 냉각 기술로 확장하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중국과학원 연구팀은 금속성 자기 냉각 물질로 초저온을 구현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지난 2월 네이처에 발표했다. 핀란드 알토대와 VTT(국립기술연구센터) 연구팀은 거대한 희석 냉동기 대신 양자칩 안에 냉각 기술을 넣는 방안을 개발 중이다.

한국도 양자 기술 기업들이 극저온 냉각 기술을 개발하고 있지만, 블루포스 같은 글로벌 선도 기업과의 기술·상용화 격차는 여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달 채굴, 자기 냉각, 칩 내장 냉각 등 개발 중인 기술은 다양하지만 목표는 같다. 냉전의 유산인 핵무기 부산물에 기댄 헬륨-3 공급망을 다양화하거나, 의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양자컴 냉각 기술 경쟁에 대해 국제학술지 사이언스는 서부 시대 '골드러시'에 빗대 '콜드 러시(Cold Rush)'라고 했다. 양자컴 패권 경쟁은 절대 영도로 가는 길을 누가 먼저 새로 뚫느냐의 싸움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