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과학계가 세계 최고 권위 미국 학회와 갈등을 빚으면서 미·중 패권 경쟁이 학계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중국 최대 과학계 단체가 미국 신경정보처리시스템학회(NeurIPS·뉴립스)에 대해 "학술 교류를 정치화했다"면서 사실상 보이콧을 선언한 것이다. 뉴립스는 오픈AI, 구글, 앤스로픽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과 학계 연구자가 모여 최신 논문을 발표하는 AI 분야 최대 학술 대회 중 하나다. 첨단 AI 흐름을 따라가려면 빠져선 안 되는 무대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등을 돌린 것이다.
오히려 "중국 참여가 줄면 뉴립스 위상이 흔들릴 수 있다"는 분석과 더불어 "중국이 첨단 AI 분야에서 미국과 결별하고 독자 노선을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美 제재 기업 논문 거부' 한 줄에 中 들끓어
발단은 지난달 23일 뉴립스가 재단 홈페이지에 공개한 2026년 논문 투고 안내문이었다. 뉴립스는 "캘리포니아에 본부를 둔 재단으로서 미국 법을 준수해야 한다"며 "미국 제재 대상에 오른 기관·개인의 논문은 접수·게재할 수 없다"고 밝혔다. 안내문에는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제재 대상 명단 링크가 첨부됐는데, 여기에는 화웨이, SMIC(중신궈지), DJI, 차이나텔레콤, 차이나유니콤 등 중국 주요 기술 기업과 하얼빈공업대, 베이항대 등 대학도 포함됐다. 그동안 뉴립스 후원사로 참여했던 화웨이까지 제재 대상에 오른 것이다.
중국 학계는 즉각 반발했다. 중국컴퓨터학회(CCF)는 지난달 25일 "특정 기관의 논문 투고를 막는 것은 학술 교류를 정치화하는 것"이라며 비판 성명을 냈다. 이어 중국 최대 과학기술 단체인 중국과학기술협회(CAST)는 "국제 학술 교류를 정치적 도구로 삼는 데 단호히 반대한다"고 입장을 발표했다. 이어 CAST는 "뉴립스에 대해선 참가비 지원을 중단하고, 뉴립스 논문을 연구 성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조치를 단행했다. 중국 연구자의 해외 학회 참가 비용을 지원해왔던 CAST가 전면 참가 금지는 아니지만, 지원과 평가에서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사실상 보이콧을 선언한 것이다.
논란이 커지자 뉴립스는 사과문을 내고 "법무팀과 의사소통 착오로 잘못된 정책이 공지됐다"고 밝혔다. 종전 정책과 달라진 게 없다고 해명하면서 한발 물러선 것이다. 하지만 CAST는 "결정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며 보이콧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뉴립스에서 활동하던 중국 학자와 기업 관계자들이 "앞으로 학회 활동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잇따라 공개하면서 갈등이 더 고조됐다.
◇"우리끼리 가도 된다" 자신감… 디커플링 가속화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단순한 학회 갈등이 아니라 미·중 디커플링의 연장선으로 보고 있다. 미·중 디커플링은 무역·기술·인적 교류 등 영역에서 상호 의존을 끊고 각자 공급망과 생태계를 따로 구축하는 흐름인데, 이런 흐름이 학술 교류의 장으로까지 번진 것이다.
이런 흐름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호주전략정책연구소(ASPI) 분석에 따르면 AI 공급망을 포함한 74개 핵심 기술 분야에서 미·중 공동 연구는 2019년 최고치를 기록한 뒤 감소세다. 같은 기간 중국과 다른 국가 간 협력은 늘고 있다. 2018년 미국이 중국으로의 기술 이전을 막는 안보 조치를 도입한 것이 분기점이 됐다는 분석이다.
그 배경에는 중국의 AI 자신감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영국 시장조사 업체 디지털사이언스의 2025년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은 이미 AI 논문 발표 건수에서 세계 1위를 기록했고, 인재 풀에서 "경쟁국을 압도하는 수준"이라고 평가를 받았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학회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25년 뉴립스 논문 1저자가 활동하는 소속 국가 비율에서 중국은 2152명을 기록해 미국(1810명)을 처음으로 추월했다.추월했다.
벨기에 메르카토르중국연구소 레베카 아르세사티 연구원은 "이번 보이콧은 첨단 AI 연구에서 중국이 자력으로 설 수 있다는 신호"라며 "중국 인재가 환영받지 못한다면 우리끼리 가겠다는 메시지"라고 했다. 미국 조지타운대 보안·신흥기술센터 윌리엄 한나스 연구원은 "중국 참여가 빠지면 뉴립스는 황폐화될 것"이라고 했다.
다만 학계 내부에선 여전히 학술 교류가 필요하다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한 중국 과학계 인사는 "정부 차원의 자력갱생 압박과 달리, 현장 연구자와 기업은 여전히 해외 동료들과 교류하고 협력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중국 베이징 프로세서국가중점실험실 천윈지 소장은 "과학이 정치의 희생양이 돼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신호"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