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54년 만에 유인(有人) 우주선을 달 궤도로 보낸 '아르테미스 2호' 임무가 지난 11일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이를 계기로 인류의 달, 화성 거주를 향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우주에서 장기 거주하려면 의약품 조달도 중요하다. 매번 지구에서 약을 실어 나르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주목받는 기술의 권위자인 제임스 스와츠<사진> 미국 스탠퍼드대 화학공학·바이오공학과 교수를 본지가 지난 9일 만났다. 한국생물공학회 춘계학술발표대회 연사로 방한한 그는 "우주 탐사에 나설 때 수많은 종류의 의약품을 싣고 가는 대신 DNA 정보와 세포 추출물만 가져가면 현지에서 필요한 약을 만들 수 있다"며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생산하는 방식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레고'처럼 갈아 끼우는 백신

스와츠 교수는 차세대 바이오 의약품 생산의 판도를 바꿀 기술로 주목받는 '무세포(cell-free) 기술'의 대가로 꼽힌다. 무세포 기술은 세포를 통째로 사용하지 않고, 단백질 합성에 꼭 필요한 리보솜·효소 등 핵심 요소만 추출해 원하는 물질을 만드는 것이다. 기존 바이오의약품 생산은 세포를 배양하고 증식시키는 데 며칠에서 몇 주가 걸리지만, 무세포 방식은 수시간 안에 단백질 합성이 가능하다. 기존 세포 배양 방식이 공장(세포) 전체를 가동해 제품을 만드는 것이라면, 무세포 기술은 필요한 부품만 챙겨 현장에서 즉석 조립하는 '레고' 같은 방식이다.

스와츠 교수가 특히 공들이는 것은 '바이러스 유사 입자(VLP·Virus-Like Particle)'다. VLP는 바이러스의 단백질 껍데기만 흉내 낸 입자다. 바이러스처럼 생겼지만 유전 물질이 없어 감염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미 자궁경부암 백신(가다실)과 일부 B형간염 백신이 VLP 방식으로 상용화돼 있다. 스와츠 교수가 개발 중인 VLP는 직경 35~45나노미터 수준이다. 머리카락 굵기의 약 2000분의 1이다.

그래픽=김성규·Gemini

◇"4~5주 만에 백신 20억회분 가능"

스와츠 교수는 VLP를 살아있는 세포 없이 시험관에서 만드는 무세포 공정을 개발했다. 이를 팬데믹 대응에 활용하면 이런 시나리오가 가능해진다. 평소에 VLP와 면역 증강 물질을 대량 생산해 미리 비축해 둔다. 신종 바이러스가 등장하면, 그 바이러스의 특성을 담은 항원 단백질만 추가로 만들어 기존 VLP 표면에 붙인다. 그러면 백신이 완성된다. 그는 "팬데믹 상황에서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사실상 항원 하나뿐"이라며 "적절한 규모의 생산 시설이 갖춰진다면 수 주 안에 백신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고 했다.

코로나 팬데믹 때는 백신을 개발하고 대량 생산 체계를 갖추는 데 거의 1년이 걸렸다. 당시에는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백신 개발 속도였다. 스와츠 교수는 "이제 팬데믹이 터지더라도 4~5주 안에 백신 20억회분을 만들 수 있다"며 "코로나 때보다 훨씬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이는 생산 시설이 충분히 갖춰지고 임상 검증이 완료된 이후를 가정한 최선의 시나리오다.

◇우주 현지 활용 목표

무세포 기술로 개발한 VLP 백신의 단점은 공정이 까다롭다는 것이다. 복잡한 항원을 구현하는 데는 아직 기술적 제약도 있다. 상용화까지 넘어야 할 산이 더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이 기술의 잠재력은 기대를 모은다. 오지에서도 지구 밖에서도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스와츠 교수는 "지금은 우주 탐사선에 50여 종의 의약품을 싣고 떠나야 한다"며 "무세포 기술이 고도화되면 DNA 정보와 세포 추출물만 가져가고, 필요한 약은 우주 현지에서 그때그때 만들어 쓸 수 있다"고 했다. 같은 원리로 개발도상국의 외딴 지역에서도 원료만 있으면 현지에서 필요한 약을 바로 만들어 쓸 수 있게 된다.

스와츠 교수는 정유 회사 엔지니어로 경력을 시작해 제약사 일라이 릴리와 제넨테크 등을 거쳤다. 그는 1998년 스탠퍼드대 교수로 부임해 무세포 기술과 VLP 백신 개발을 이끌었다. 올여름 은퇴를 앞둔 그는 "편히 쉴 수도 있지만 세상에 기여할 기회가 남아 있다면 계속 도전하고 싶다"며 "새 회사를 설립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