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의 기록으로 구성해낸 계유정난 당시 주요 왕족인 단종, 수양대군(세조), 안평대군, 그리고 관료들의 연결망./카이스트

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으로 단종과 세조, 그리고 계유정난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가운데, 국내외 연구진이 조선 관료 사회의 흥망을 데이터로 분석한 연구 결과를 내놨다. 단순한 권력 다툼을 넘어, 조선의 관료제가 어떻게 작동했고 또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과학적으로 추적한 것이다.

박주용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연구진은 최동혁 홍콩침례대학 박사, 홍콩대 연구진과 함께 조선왕조실록과 문과방목(과거 급제자 명단)을 분석해 조선 관료 1만4600여 명의 경력 패턴을 확인했다고 1일 밝혔다. 이번 연구는 국제 학술지 '피지카 A: 통계 역학 및 응용(Physica A: Statistical Mechanics and Its Applications)' 4월호에 게재됐다.

연구진은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1453년 계유정난 당시 인물 관계망을 정량 분석했다. 그 결과 세조와 가까운 인물들은 정변 이후 공신으로 부상한 반면, 안평대군과 연결된 인물들은 대거 숙청되는 등 권력 재편의 영향이 관료 사회 전반에 뚜렷하게 나타났다.

다만 연구진은 이런 무력 정변이 조선사에서 예외적 사건이라는 점에 주목해,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관료제의 구조를 살폈다. 이를 위해 관직의 높이와 재직 기간을 반영한 '총성공지표(Total Success Index)'를 개발해 각 관료의 경력을 수치화했다.

분석 결과, 조선 건국 이후 약 400년 동안은 가문이나 지역에 따른 차이가 존재했지만, 개인의 성공 가능성이 완전히 고착되지는 않은 비교적 안정적인 상태가 유지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당시 관료제에 일정 수준의 공정성과 사회 이동성이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상황은 달라졌다.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일부 가문이 경쟁보다 권력을 통해 과거 급제와 고위직 진출을 독점하기 시작했고, 관료 사회의 불평등도 빠르게 심화됐다. 연구진은 이를 공정한 인재 선발 시스템의 붕괴로 해석했다.

연구진은 조선의 몰락이 단일 사건의 결과가 아니라, 인재 등용 체계가 무너지고 권력이 특정 집단에 집중되면서 벌어진 '시스템 붕괴'의 결과였다고 설명했다.

박주용 교수는 "이번 연구는 개별 사건 해석을 넘어 국가 구조의 장기적 변화를 살펴본 사례"라며 "국가의 흥망에 개인과 집단의 행위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공정성과 인재 등용 문제에도 시사점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디지털화된 역사 자료와 과학적 분석의 결합은 과거를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래 사회를 전망하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연구진은 향후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조선사 데이터베이스를 확장하여 해외의 관료제와 비교하고, 전 세계와의 교류 기록도 분석하여 조선의 국제사적 의의를 거시적으로 규명할 계획이다.

참고 자료

Physica A: Statistical Mechanics and Its Applications(2026), DOI: https://doi.org/10.1016/j.physa.2026.131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