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한국인 박사 과정 학생의 논문이 화제가 됐다. 9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학교에서 사상 처음으로 이른바 '발로 읽는' 논문이 학위 심사에 오른 것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책자 형태의 기존 논문과 완전히 다르게 10m 길이로 가로로 쭉 펼쳐진 한지 두루마리에 논문이 담겨 있었다. 한자리에서 끝까지 읽을 수도, 빠르게 넘길 수도 없다. 논문을 다 읽으려면 오른쪽으로 한참 걸어야 한다. 옥스퍼드대는 두루마리를 논문 형식으로 인정할지 심사를 별도로 열었고, 형식을 인정받은 이 논문은 내용 심사에서도 만장일치로 순수미술 철학박사 학위 논문으로 통과됐다.
26일 옥스퍼드대 애슈몰린 박물관이 정식으로 구입해 영구 소장, 전시하기로 한 이진준(52) 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의 박사 논문 이야기다. 대학 박물관으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애슈몰린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보다 110년 앞선 1683년에 문을 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등 거장들 작품을 소장한 이곳이 생존 작가의 박사 논문을 영구 컬렉션에 포함한 것은 예술·학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는 의미다. 박물관 측은 "한국 현대 작가 작품으로는 최초로 영구 소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의 박사 논문 '빈 정원(Empty Garden)'은 조선 시대 문인들의 의원(意園·상상의 정원)을 자연과 인공의 '경계(境界) 공간'으로 주목하고, 디지털 기술 시대 인간의 감각과 사유를 탐구한 결과물이다. 이 교수는 "정원의 '거닐기'를 자연스럽게 체험하게 하는 방법을 궁리하다, 논문을 가로 10m 두루마리 한지에 쓰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했다. 이 논문은 예술도 스마트폰으로 한눈에 빠르게 소비하는 시대에 '몸의 경험과 사유의 깊이는 점점 얕아진다'는 화두를 던졌다. 그는 "AI(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는 존재'로 과연 남을 수 있을까 고민"이라며 "공기처럼 AI가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될수록 인간 고유성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이 더 중요해진다"고 말했다.
KAIST 사상 처음으로 미술가 출신 전임교수로 임용된 그는 '학위 수집가'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이력이 독특하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학교 미대 조소과에 편입해 학·석사를 마쳤고, 영국 왕립예술대학(RCA)에서 석사, 옥스퍼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찰스 디킨스, 스티븐 호킹 등이 거쳐 간 '영국 왕립예술학회' 석학 회원으로도 선정됐다.
그는 AI 시대 데이터를 단순히 저장·통제의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정원을 가꾸듯 천천히 다루고 경험하면서 인간의 감각과 사유를 회복해야 한다는 '데이터 가드닝(Data Gardening)' 개념을 제안했다. 효율과 속도를 최우선으로 하는 시대에 대한 일종의 저항인 셈이다.
이 교수는 "우리가 망설이고, 천천히 움직이고, 비효율적으로 느끼는 것들이 오히려 인간다운 요소일 수 있다"며 "이제는 다시 '몸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