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층을 끌어오는 전략보다 강한 입장을 가진 집단의 '온도'를 낮춰 중립 상태로 유도하는 것이 합의를 더 빠르게 만든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중립 지대가 넓어질수록 사회적 합의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집단 의사결정을 수학적 모델과 실험으로 분석한 결과로, 정치·사회 갈등이 양극화되는 상황에서 주목할 결과라는 평가가 나온다.
영국 바스대와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공동 연구팀은 이 같은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어드밴스드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집단 의사결정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수학적 모델을 개발했다. 이 모델에 따르면 집단이 합의에 이르는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상대를 설득해 특정 입장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갈등이 심화될 때 일부가 중립 상태로 물러났다가 다시 입장을 정하는 방식이다. 연구진은 후자를 '갈등 완화 경로(de-escalation)'로 정의하고, 이 방식이 오히려 합의를 더 빠르게 이끈다고 분석했다.
핵심은 '중립'이 집단 구조를 바꾼다는 점이다. 중립 상태에 있는 사람이 늘어나면 적극적으로 입장을 내는 참여자가 줄어들면서 집단 규모가 작아진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 이 경우 소수의 선택이 전체 방향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합의 속도가 빨라진다.
예를 들어 100명이 50대 50으로 맞선 상황에서는 일부가 입장을 바꿔도 전체 흐름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 반면 상당수가 중립으로 물러나면 남은 소수의 변화 만으로도 집단 전체의 방향이 바뀔 가능성이 커진다.
이 같은 현상은 실험에서도 확인됐다. 연구진이 온라인 익명 투표 실험을 진행한 결과, '중립' 선택지를 허용했을 때 집단 의사결정이 더 빠르고 명확하게 이뤄졌다. 반대로 모든 참여자가 반드시 한쪽 입장을 선택하도록 한 경우에는 합의가 지연되거나 교착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동물 집단에서도 유사한 패턴이 관찰됐다. 이동하는 메뚜기 떼는 방향을 바꿀 때 상당수가 일시적으로 움직임을 멈추는 '중립 단계'를 거친 뒤, 소수 개체가 방향을 정하면 전체 무리가 빠르게 따라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를 이끈 크리스천 예이츠 교수는 "중립적 입장을 허용하면 재검토의 여유가 생기고, 그 결과 합의 형성과 입장 전환이 수월해진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정치 양극화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기존 전략을 재검토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그동안 정치권에서는 부동층을 설득해 지지 기반을 넓히는 전략이 주를 이뤘지만, 실제로는 강한 입장을 가진 집단의 '온도'를 낮추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이번 결과를 현실 정치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실제 사회에서는 이해관계와 권력 구조, 정보 환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만 갈등이 심화될수록 '누가 더 많은 사람을 설득하느냐'보다 '누가 먼저 한 발 물러서느냐'가 집단의 방향을 바꾸는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공동 저자인 팀 로저스 교수는 "중요한 사안에서 입장을 유보하는 태도는 답답하게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집단이 더 나은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