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연구실에서 세포에 작은 유전자 장치를 삽입한다. 이 장치는 세포 안에서 일어나는 분자 반응을 시간 순서대로 기록한다. 세포가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특정 유전자가 언제 발현했는지, 치료 약물에 세포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데이터로 남기는 것이다.
정부 출연 연구원인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이 10대 바이오 미래 기술 중 하나로 꼽은 '실시간 세포내 기록장치'다. 세포를 단순히 들여다보는 시대에서, 세포의 '이력'을 축적하는 시대로의 전환을 예고하는 기술이다. 개인 맞춤형 의료에 적용되면, 의료진의 추정에 의지하지 않고도 "왜 이 환자는 약이 듣지 않았는가"를 데이터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가상 세포'로 약물 효능 실험
생명공학연구원(생명연)은 실시간 세포내 기록 장치를 비롯해 가상 세포, 세포 역(易)노화 RNA 치료제, AI(인공지능) 기반 합성식물체, RNA 농약 등 10개 기술을 '2026년 10대 바이오 미래기술'로 최근 선정했다. 이번에 발표한 바이오 미래 기술은 생명과학을 기반으로 향후 5~10년 안에 기술적, 산업적 실현이 가능하고 파급 효과가 클 것으로 전망되는 기술을 뜻한다.
10대 기술로 뽑힌 '가상 세포(Virtual Cell)'는 AI와 시스템 생물학 모델을 결합해 세포 반응을 디지털로 예측하는 기술이다. 예컨대 신약 후보 물질을 실제 세포에 투입하기 전에 가상 세포로 신호 전달 경로의 변화를 정밀하게 시뮬레이션하는 것이다. 생명연은 "가상 세포는 후보 약물의 표적 탐색 실패율을 낮추고 실험을 선별해 R&D(연구·개발) 비용을 줄이고, 신약·바이오 소재 산업의 생산성을 높일 것"이라고 밝혔다.
◇DNA에서 RNA로… 조절의 시대
DNA를 영구적으로 바꾸지 않으면서 RNA 기반 조절 분자를 투여해 노화 세포 기능을 회복하는 '세포 역노화 RNA 치료제'도 10대 바이오 미래 기술로 선정됐다. '영구 변형'이 아닌 '가역적 조절'이라는 점에서 유전자 편집 기술보다 안전성이 높다는 기대를 모은다. 생명연은 이 기술이 5년 후 눈이나 간과 같은 특정 장기를 대상으로 한 초기 임상 단계로 발전할 것으로 내다봤다. 또 10년 후에는 전신 노화 제어, 건강 수명 연장을 목표로 하는 상용화 치료제가 등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특정 해충·병원균 유전자만 정밀 억제하는 RNA 농약도 바이오 미래기술로 뽑혔다. '정밀 농약' 시대의 핵심 기술로 꼽히는 RNA 농약이 기존의 화학 농약보다 환경 오염을 줄이고 내성(耐性) 한계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AI, 바이오 융합 고도화
미래 바이오기술로 선정된 'AI 에이전트 기반 가상 바이오 실험실'은 AI 요원들이 스스로 가설을 설정하고 실험 설계와 데이터 분석, 검증까지 수행하는 기술이다. AI가 연구를 '지원'하는 단계를 넘어 연구를 '주도'하는 핵심 주체로 떠오르고 있다는 분석이다.
'양자컴퓨팅 기반 AI 신약 개발'과 'AI 기반 합성식물체'도 10대 바이오 미래기술로 뽑혔다. AI가 신약 개발과 합성생물학 연구 속도를 대폭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멸종 생물 등 미개척 생명 자원을 분석해 신약 바이오 소재를 개발하는 '잠재 생명자원 발굴·활용'과, 농축산·식품 부산물 등을 항공유 등급의 연료로 전환하는 '지속가능한 항공유 생산'도 바이오 미래기술로 선정됐다. 생명자원 주권과 탄소감축 시대를 겨냥하는 기술이다.
생명연은 "바이오 분야는 장기간·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만큼, 미래기술의 조기 발굴이 혁신 생태계 구축의 출발점이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