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섭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부원장이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발표하고 있다./NST

재난·안전 기술을 연구하는 주요 출연연들이 재난 대응의 무게중심이 '완전 차단'에서 골든타임 확보로 옮겨가고 있다며, 확산 차단과 조기 예측을 위한 대응 기술을 고도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연구과제중심제도(PBS) 폐지 이후 연구 자율성과 기관 간 융합이 확대될 것으로 기대하면서도, 자율성이 방만으로 흐르지 않도록 성과관리·책임 체계 등 보완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5일 문병섭 한국건설기술연구원(건설연) 부원장, 권용장 한국철도기술연구원(철도연) 부원장, 이명종 한국지질자원연구원(지질연) 부원장은 서울 강남구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각 기관의 재난 대응 연구 현황을 소개했다.

문병섭 건설연 부원장은 대표 연구 사례로 '물류시설 화재 대응'을 들었다. 그는 "새로운 건축물은 화재 발생을 최소화할 좋은 자재를 쓰면 되지만 문제는 이미 지어진 건물"이라며 "운영 중인 물류센터를 철거하지 않고 보강하는 '비철거 충전형 공법'이 대안"이라고 설명했다.

비철거 충전형 공법은 벽체 일부 구간에 화재 확산을 막는 단열재를 띠 형태로 충전해 방화 구획을 만드는 방식이다. 물류시설을 그대로 이용하면서도 확산을 지연시켜 대피·초기대응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게 건설연 설명이다. 문 부원장은 실물 규모 시험을 통해 골든타임 15분 확보가 가능하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말했다.

문 부원장은 "공모를 통해 롯데 물류센터에 시범 적용을 진행했다"며 "관련 내용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 LG 측에서도 관심을 표했다"고 덧붙였다.

건설연은 도시 침수에 대비한 전략도 연구하고 있다. 문 부원장은 "갑자기 집중호우가 발생하면 도심은 불투수 포장(빗물이 스며들지 않는 아스팔트·콘크리트) 등으로 물이 한꺼번에 몰려 피해가 커진다. 따라서 사전 경보를 강화하는 게 현실적인 해법"이라며 "인공지능(AI)으로 홍수 예고 지점을 확대하고 내비게이션과 연계해 위험 구간을 미리 안내하는 서비스를 구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존 예고 지점은 75곳이었는데 AI를 활용해 223곳으로 확대할 수 있다"고도 말했다.

◇ 땅속은 광섬유, 선로는 위성… AI로 재난 대응 '정밀화'

지질연은 지진·산사태·싱크홀 등 땅속 재난을 탐지-진단-대응의 전주기로 통합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이명종 지질연 부원장은 지질연을 '땅속을 연구하는 연구원'이라고 소개하며, 한반도 지진환경 모델 구축과 조기경보 고도화, 산불 이후 집중호우로 이어지는 2차 산사태 위험을 겨냥한 예측 모델, 도시 싱크홀 탐지·안정성 평가 체계를 주요 성과로 소개했다.

이 부원장은 산사태를 복합재해의 전형이라고 소개하며 "산불이 일어난 후에 여름이 되면 비가 많이 오면서 해당 지역에 산사태가 일어날 확률이 높아진다. 이를 2시간 반 이내로 예측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고, AI를 접목해 예측 정확도와 적용 범위를 넓힐 계획"이라고 말했다.

특히 지질연은 전국 광통신망의 다크파이버(여유 광섬유)를 센서처럼 활용해 온도·진동·응력 등을 감지하는 국토 단위의 모니터링 체계를 구상하고 있다. 이 부원장은 "탐지는 탐지, 진단이면 진단, 대응 분야가 다 분절된 상태로 연구들이 많이 진행돼 실제 재난 대응이 일관된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며 "국가 전략형 지질재해 통합 AI 플랫폼을 목표로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명종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부원장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권용장 철도연 부원장은 기후 재난이 철도 안전을 직접 위협하는 요인으로 커지고 있다고 보고, 폭염 시 레일이 팽창해 위험이 커지는 구간을 위성으로 찾아내 선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위험 구간을 자동 감지해 경보를 주고, 필요하면 그 구간만 서행 운전할 수 있도록 하는 체계를 개발 중"이라고 설명했다.

안전을 위한 현장 작업의 무인화·로봇화도 강조됐다. 권 부원장은 "터널·선로 유지보수처럼 작업 환경이 열악하고 사고 위험이 큰 분야에서는 로봇·피지컬 AI로 사람을 대체해야 한다"며 "무인 운전, 무인 정비, 로봇 기반 인프라 유지보수 등을 묶어 도시철도의 24시간 운영 가능성까지 검토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 PBS 폐지… "돈 따라가는 연구에서 자기주도·융합으로"

이날 현장에서는 PBS 폐지 이후 출연연 연구 생태계 변화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PBS는 출연연이 경쟁을 통해 국가 연구개발(R&D) 과제를 수주하도록 한 제도다. 정부는 PBS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출연연이 안정적인 기본 재원을 바탕으로 기관 미션 중심 연구와 기관 간 융합 연구를 확대하도록 제도를 개편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권 부원장은 "PBS 체제 아래에서는 '돈 주고 시키면 하는 연구'가 반복되면서 발주처 요구에 종속될 수 있고, 때로는 연구의 깊이보다 진도 점검에 끌려갈 수 있다"며 "PBS 폐지 이후로는 자기 주도 연구를 하면서 더 깊이 있는 연구가 가능하고, 연구자 주도성을 회복하는 계기도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권 부원장은 "자율이 방만으로 흐를 위험도 있다"며 "내부 성과관리와 책임 체계가 중요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PBS 폐지를 앞두고 추진되는 전략 연구단(융합형 대형 과제)에 대해 문 부원장은 "경쟁을 통해 자생력을 키우던 시대는 지났고, 융합을 통해서 더 나은 담론을 만들어가는 시대"라며 "3월 초부터 출연연들이 자율적으로 어떻게 연구를 융합해 전략 연구를 진행할지 논의하는 일정들이 잡혀있다. 예를 들어 건설연의 지하 매설관(상·하수도관 등) 기반 땅꺼짐 예측과 지질연의 지하수·싱크홀 분석을 결합하면 시너지가 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부원장 역시 "전략 연구를 계기로 각 기관의 기본 사업이 분절적으로 머무르지 않고 융합 과제로 발전할 것"이라며 "그 결과가 국민이 체감하는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