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이 대형화·일상화되면서 재난을 겪은 이들의 심리 회복 지원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전문 인력이 충분하지 않고, 상담 기록과 사례 관리가 수기나 엑셀 중심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 장기 추적과 체계적 관리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이 같은 공백은 회복 지연이나 추가적인 심리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낳는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연구진이 한국트라우마연구교육원, ㈜트로닉스, ㈜후트론, ㈜다이퀘스트, 광신대와 함께 인공지능(AI)과 정보통신기술(ICT)을 결합한 재난심리회복지원 플랫폼을 개발했다고 27일 밝혔다.
이번 플랫폼의 가장 큰 특징은 재난심리회복지원 업무 전 과정을 디지털 기반으로 전환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현장에서 관행처럼 사용되던 수기 기록과 스프레드시트 관리 방식에서 벗어나 심리지원 활동가 등록 및 활동 이력 관리, 재난 경험자 사례 발굴·등록, 생애주기별(청소년·보호자·성인 등) 맞춤형 정밀 심리평가와 면접지 제공 기능 등을 갖췄다.
플랫폼에는 국내 최초로 개발된 '재난 후 성장 척도'와 '재난 회복탄력성 척도'가 적용돼, 단순히 증상 유무를 확인하는 수준을 넘어 재난 이후 심리 회복의 과정과 변화를 보다 세밀하게 살필 수 있도록 했다.
또 하나의 핵심은 지속 관리 기능이다. 연구진은 디지털 휴먼(Digital Human) 기술을 활용해 일상 상태를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라이프로깅 기반 평가 기능을 구현했다. 이를 통해 상담 인력이 상시 개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재난 경험자의 심리 상태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더불어 전국 심리지원 활동가와 연계되는 원격 상담 시스템도 구축해,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지원이 가능하도록 했다.
연구진은 지난 3년간 재난을 경험한 한국인 약 2000명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를 진행해 재난 경험자 기반 데이터셋을 마련했다. 기술 개발과 함께 제도 기반도 다졌다. 연구진은 2023년 표준 제정을 시작으로 재난심리지원 서비스 시스템 참조 구조 고도화를 추진해 왔으며, 2025년 최종 개정을 완료했다. 해당 표준은 '2025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TTA) 우수 표준'에도 선정됐다.
실제로 지난해 2월 대전광역시 관저2동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피살 사건 당시 연구진이 개발한 '생애주기별 재난심리회복 상담 일지 5종'이 투입돼 11일간 유족과 목격자 심리 안정 지원에 활용됐다. 또한 2년 동안 3차례에 걸쳐 전국 재난심리지원센터 소속 활동가 50여 명을 대상으로 실증한 결과, 평균 80점 이상 만족도를 기록했다.
한국트라우마연구교육원 주혜선 원장은 "재난심리지원에서 전문가와 재난 경험자를 효과적으로 매칭하고 관리할 수 있으며, 회복 지원 자원을 통합적으로 파악해 공유하는 데 유용한 플랫폼"이라고 평가했다.
오승훈 ETRI 인공지능융합연구실 책임연구원은 "이번 플랫폼은 단순한 기술 개발을 넘어 국민의 생명과 정신 건강을 지키는 국가 안전망을 AI 시대에 맞게 강화하는 핵심 인프라"라며 "관계 부처와의 협력을 통해 현장 확산을 앞당기겠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앞으로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 실무자와 활동가 의견을 지속적으로 반영해, 더 많은 국민이 안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플랫폼 기능과 성능을 단계적으로 고도화해 나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