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3일 대구 달성군에 있는 한국생산기술연구원(생기원) 대경기술실용화본부(대경본부)를 찾았다. 연구동 투어는 잠금장치가 달린 문을 하나씩 여는 일로 시작됐다. "보안 시설이라 문이 다 잠겨 있다"는 연구진 설명과 함께 출입문이 열리자, 기업들이 혼자서는 메우기 어려운 시험·검증의 '빈 구간'을 메우기 위한 장비들이 복도 끝까지 이어졌다.
가장 먼저 시선이 멈춘 곳은 고온에서 소재 물성을 뽑아내는 설비였다. 금속 시편을 장치 사이에 끼우고 전류를 흘려 순간적으로 온도를 1500도 안팎까지 올린 뒤, 성형 과정에서의 거동을 데이터로 남기는 장비였다. 연구진은 "이 장비만 17억원 수준이고 옵션까지 붙으면 더 올라간다"고 했다.
옆으로는 부품을 공중에 매달아 고유 진동 특성을 뽑는 시험 셋업, 베어링 부품 시험을 위해 특허를 내 제작했다는 소형 다이나모(시험기) 등이 줄지어 소개됐다. 플라스틱·금속 적층제조(3D프린팅) 장비, 고온·고압으로 분말 소재를 치밀화하는 프레스(소결) 장비 등 '설계-제작-시험'의 양 끝을 잇는 공정 장비들도 같은 동선에 배치돼 있었다. 분말을 한 층씩 깔고 레이저로 녹여 형상을 쌓아 올린 뒤, 남은 분말을 걷어내며 발굴하듯 시제품을 꺼내는 공정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현장 연구진은 "기업이 필요할 때마다 외부 의뢰로 해결하기도 어렵고, 매번 비용과 시간이 붙는 구간을 출연연 인프라로 상시 뒷받침하는 게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대경본부가 이런 '상시 지원' 체계를 지역 기업과의 장기 협력 모델로 묶어 운용하는 사업이 메가프로그램이다. 메가프로그램은 생기원이 지역 제조업의 전환을 돕기 위해 운영하는 장기 협력 모델로, 전국 10개 지역본부를 축으로 지자체·선도기업(혁신기업)·협력사·대학을 하나의 팀으로 묶는다. 현장 설명에 따르면 연구 기간은 2024년부터 2031년까지이며, 단발성 과제보다 중장기 관점에서 기술 개발·실증·인력 양성을 함께 추진하는 방식이다. 지자체-출연연-기업이 매칭으로 재원을 부담하고, 컨소시엄이 목표와 예산을 함께 정한다.
이 프로그램의 대표 사례로 대경본부가 내세운 기업이 자동차 부품사 평화발레오다. 평화발레오는 ㈜PHC 계열사로, 프랑스 발레오와의 합작으로 1988년 설립돼 클러치 디스크·커버·릴리스 베어링 등 변속기 핵심 부품에서 경쟁력을 쌓아온 기업이다. 최근에는 내연기관 중심 제품 구조를 전기차·수소차용 부품으로 전환하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회사에 따르면 2024년 매출은 7304억원을 기록했다.
생기원은 메가프로그램을 통해 지역에 필요한 분야를 정하고, 기업은 시장과 제품 요구 사항을 제시하며, 생기원의 연구 인력과 장비를 바탕으로 설계·공정·시험을 지원한다. 기업 한 곳만 키우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해당 기업의 협력사까지 함께 끌어올려 산업군 전체가 체질을 바꾸도록 설계했다.
◇ 출연연 지원으로 신제품 리스크 낮춘 자동차 부품 전환
생기원 대경기술실용화본부가 모빌리티 부품을 특화 분야로 택한 배경에는 지역 산업 구조가 있다. 대구·경북에는 자동차 부품 기업이 2700개에 달하지만, 상당수는 엔진·변속기 등 내연기관 중심 품목에 기반해 성장해 왔다. 전기차와 수소차로의 전환 속도가 빨라질수록 기존 주력 품목은 수요 변동이 커질 수밖에 없다.
조용재 대경본부 모빌리티·로봇부품그룹장은 "지역에 있는 기존 부품 산업이 친환경차 부품 산업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연구 인력과 인프라를 활용해 그 연결 구간을 메우는 역할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대경본부가 구상한 방식은 '지역 앵커(선도) 기업'에서 전환 수요를 먼저 키우고, 그 성과를 협력사까지 확산시키는 모델이다.
다만 평화발레오가 처음부터 메가프로그램의 '원픽'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게 대경본부 설명이다. 본부는 지역 모빌리티 기업들을 폭넓게 접촉한 뒤, 지자체 공고를 통해 컨소시엄 평가 절차를 거쳐 혁신기업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평화발레오 측의 메가프로그램 지원 배경으로는 전환 과정에서의 '연구 기반 공백'이 꼽혔다. 전동화 확산으로 내연기관 부품의 성장 한계가 뚜렷해지면서 회사 내부에서도 차세대 먹거리로의 전환 필요성이 커졌지만, 전기차·수소차용 핵심 부품으로 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설계·평가·실증 역량을 단기간에 갖추기 어렵다는 제약이 있었다는 것이다. 평화발레오가 사업 전환을 추진 단계로 올린 시점은 2022년 무렵이다.
현장에서 만난 장진호 평화발레오 연구개발2부문 전무는 "신제품을 100% 자체 투자로 추진하면 리스크가 큰데, 생기원 지원이 결합되면서 개발 속도와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일정에 쫓기는 기업 입장에서는 시제품 제작과 성능 검증만으로도 벅찬데, 소재와 설계 근거, 평가 방법 같은 기초 기반을 연구진이 보완해 주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메가프로그램의 협력 구조는 선도기업을 중심으로 협력사까지 포괄한다. 완성차가 요구하는 성능을 맞추려면 핵심 부품만이 아니라 그 아래 단계의 부품 품질도 함께 올라와야 하기 때문이다. 평화발레오에 따르면, 대구·경북에만 협력사가 69개 정도다.
대경본부는 이에 대해 "기술 지원과 함께, 협력사에 대한 공정 개선·품질 개선 지원도 병행하는 방향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 소재·설계·양산 검증까지 한 트랙으로… 현대차 납품까지
대경본부가 강조한 키워드는 '처음부터 끝까지'였다. 부품을 설계해 시제품만 만드는 수준을 넘어, 소재 분석부터 설계 지원, 제조 공정 개발, 성능 평가와 내구 시험, 양산 검증까지 한 흐름으로 이어 붙일 수 있다는 뜻이다.
마중물 협력 단계에서 나온 성과도 대부분 이 흐름 위에 놓여 있다. 소재 분야에서는 주철의 약점 보완이 사례로 소개됐다. 주철은 단단하지만 충격에 깨지기 쉬운 성질이 있어 부품 설계에서 제약이 생길 때가 있다. 연구진은 합금 성분을 조정해 이런 약점을 줄이는 방향으로 소재를 개선했고, 기업은 이를 적용한 시제품을 제작했다. 해당 소재를 완성차에 실제로 쓰려면 기업 내부 기준(사내 규격) 등록 같은 절차가 필요한데, 현재 그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수소차용 공기압축기와 베어링 기술도 핵심 축으로 거론됐다. 수소차는 연료전지 스택에 공기(산소)를 안정적으로 공급해야 하는데, 공기압축기가 그 역할을 맡는다. 이 장치가 고속으로 돌아갈수록 핵심이 되는 부품이 베어링이다. 현장에서는 가스 포일 베어링이 언급됐다. 기름으로 윤활하는 대신, 고속 회전 중 형성되는 공기층을 이용해 마찰을 줄이는 방식으로, 고속·고출력 조건에서 장점이 크다. 연구진은 설계·평가 기반을 보강했고, 기업은 이를 토대로 양산과 차세대 사양 개발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평화발레오에 따르면, 2024년 개발한 공기 압축기는 양산에 성공해 현대자동차의 승용차 '넥쏘'에 공급되고 있으며, 현대차와의 공급계약을 통해 2028년까지 엑시언트, 넥쏘에 공급될 예정이다.
ELD(전자식 차동기어 잠금장치)와 TVED(토크 벡터링 전동 장치) 등 전기차 구동계 부품 개발도 진행 중이다. ELD는 헛도는 바퀴에 차동을 잠가 반대쪽 바퀴로 구동력이 가도록 돕는 장치, TVED는 코너에서 좌우 바퀴에 보내는 힘을 달리해 차가 말려 들어가거나 쏠리는 것을 줄이는 장치다.
제조 라인 자체를 '인공지능(AI) 기반 자율 제조'로 고도화하는 계획도 함께 제시됐다. 여기서 말하는 AI 자율 제조는 사람 손을 완전히 없앤다는 의미라기보다, 센서로 공정 데이터를 모으고 AI가 불량 징후를 찾거나 공정을 최적화해 품질과 생산성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접근에 가깝다. 대경본부는 불량 검출 알고리즘 적용, 공정의 디지털 트윈(현장을 가상 공간에 복제해 시뮬레이션하는 방식) 기반 에너지 관리 같은 과제를 이미 병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지자체-출연연-기업 '매칭'으로 진행… 관건은 장기 로드맵
평화발레오 측은 기존 R&D 과제 대비 메가프로그램의 차별점으로 '유연성'과 '후속 지원'을 꼽았다. 장진호 평화발레오 전무이사는 "다른 연구기관에 의뢰하면 계약된 과제 성능만 맞추는 경우가 많은데, 생기원은 필요하면 관련 전문가가 붙어주고 양산 단계까지 애프터서비스처럼 함께 간다"고 했다. 기업 내부 일정에 쫓겨 기초 설계 근거나 이론을 챙기기 어려운 현실에서, 출연연이 설계·해석·평가의 백업을 제공하는 효과가 크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다만 현장에서는 "지자체 사업이 1년 단위로 편성·평가되다 보니 중장기 추진이 어렵다"며 장기 로드맵을 전제로 한 제도화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전동화·수소차 부품 개발은 설계-시험-양산 검증까지 시간이 걸리는데, 매년 예산이 재편성되면 일정이 흔들리고 기업의 설비·공정 투자 결정도 늦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대경본부는 메가프로그램을 최소 8년 정도의 장기 과제로 보고 '혁신기업 연구개발(R&D) 트랙'과 '협력사 현장 제조기술 지원 트랙'으로 나누는 방안도 지자체와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대경본부가 메가프로그램의 끝에 그리는 그림은 기술만이 아니다. 경북대와 모빌리티 부품 관련 공동학과를 협의 중이며, 기업이 필요로 하는 역량을 커리큘럼에 반영해 지역에서 배운 인재가 지역 기업으로 취업하는 선순환을 만들겠다는 구상도 내놨다. 지역 대학에서 배운 기술이 지역 기업의 일자리로 연결돼야 지역 소멸에도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는 평화발레오 사례를 하나의 '대표 모델'로 만들겠다는 말도 나왔다. 선도 기업이 전환에 성공하면 협력사도 함께 올라오고, 그 과정에서 지역 산업군 전체가 친환경차 중심으로 재편되는 속도가 빨라질 수 있다는 기대다.
성지현 대경본부 본부장은 "메가프로그램은 한 기업만 돕는 사업이 아니라, 지역의 모빌리티 부품 산업군 전체를 함께 키우는 우산"이라며 "기술 개발과 인력 양성을 같이 묶어 지역에 선순환을 만들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