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오른쪽 남태평양에 있는 섬나라 바누아투에서는 겨울을 앞두고 통돼지 바비큐를 나눠 먹는다고 한다. 돼지를 통째로 땅에 묻고 뜨거운 돌로 덮어 찐다. 지난해 한 예능 방송에서 연예인들이 맛보고 극찬한 요리다. 바누아투의 통돼지 바비큐는 어쩌면 대만의 돼지 족발 요리와 먼 친척뻘일지 모른다.
과학자들이 돼지의 DNA 유전자를 해독했더니 4000여 년 전부터 돼지가 사람들을 따라 대만에서 태평양 섬까지 이동한 것으로 나타났다.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섬들에 퍼진 돼지는 인류가 그린 가장 오래된 동굴 벽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돼지가 인류의 이주 과정을 밝힐 타임캡슐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4000년 전부터 동남아와 태평양으로 퍼져
영국 퀸메리대의 로랑 프란츠(Laurent Frantz) 교수가 이끈 국제 공동 연구진은 수천 년에 걸쳐 인류가 태평양 섬들로 이동하면서 돼지가 아시아·태평양 전역에 퍼졌다고 밝혔다. 연구 결과를 담은 논문은 지난 2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렸다.
동물은 시간이 지나면서 주변으로 퍼진다. 그렇다고 모든 곳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진화생물학자인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는 호주와 인도네시아 사이에 야생동물이 겹치지 않는 생물지리학적 경계인 이른바 '월리스 선'을 발견했다. 표범과 원숭이는 월리스 선 왼쪽인 아시아 쪽에서만 발견되고, 캥거루 같은 유대류나 타조를 닮은 화식조의 서식지는 호주와 태평양 섬에 국한된다.
돼지는 다른 동물과 달리 월리스 선을 넘어 동남아시아는 물론 호주 위쪽 파푸아뉴기니부터 바누아투, 폴리네시아 등 태평양 전역에 퍼져 있다. 연구진은 돼지의 이동 경로를 찾기 위해 2900년에 걸친 현대·고대 돼지 117마리의 유전 정보를 해독하고, 돼지의 미토콘드리아 DNA 해독 정보 585편과 비교했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에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작은 기관인데, 세포핵과 달리 DNA가 모두 난자에서 유래한다. 이 DNA의 변화 과정을 역추적하면 오늘날 돼지를 있게 한 어미의 이동 시기와 경로를 알 수 있다.연구진은 현대 표본 401점과 고대 표본 313점에서 얻은 이빨 정보도 분석해 신뢰도를 높였다.
분석 결과 필리핀에서 하와이에 이르는 태평양 전역의 돼지들은 최소 4000년 전부터 농경민들과 같이 중국 남동부와 대만에서 출발해 파푸아뉴기니, 바누아투 섬을 거쳐 태평양 섬들로 이동한 집돼지의 후손으로 밝혀졌다. 또 인도네시아에 사는 자바 사마귀돼지와 술라웨시 사마귀돼지가 4000여 년 전부터 주변 지역으로 퍼진 경로도 확인됐다.
200년 전 식민지 시기에는 유럽인이 기르던 돼지가 도입됐다. 코모도 제도에서는 집돼지가 탈출해 수천 년 전 술라웨시에서 사람들이 가져온 사마귀돼지와 교잡된 것으로 밝혀졌다. 현지의 잡종 돼지는 현재 멸종 위기종인 코모도왕도마뱀의 먹잇감이라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인간이 데려온 돼지가 오늘날 생태계의 일부로 정착한 셈이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가 야생동물 보호에 새로운 질문을 제기한다고 밝혔다. 돼지는 어떤 곳에서는 현지 생태계에 깊이 뿌리내려 거의 토착종으로 여기지만, 다른 곳에서는 여전히 생태계를 파괴하는 외래 침입종으로 간주된다. 프란츠 교수는 "토착 동물을 보존해야 한다면 어떤 시점에서 토착종으로 간주해야 하는지 답해야 한다"며 "만약 수만 년 전에 인간이 종을 도입했다면 이들을 보존할 가치가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현생인류 이주 과정 보여주는 타임캡슐
외래종인지 토착종인지 가리기 힘들어도 돼지는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서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이미 인류가 그린 가장 오래된 동굴 벽화의 주인공으로, 인류의 이주 과정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막심 오버트(Maxime Aubert) 호주 그리피스대 교수 연구진은 2024년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에서 발견된 레앙 카람푸앙(Leang Karampuan) 동굴 벽화가 5만1200년 전에 그려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사람 3명과 멧돼지 1마리가 함께 있는 그림은 가장 오래된 동굴 벽화이자 사냥도로 인정받았다.
그전까지 가장 오래된 동굴 벽화는 같은 연구진이 2021년 '사이언스 어드밴스'에 발표한 4만550년 전 멧돼지 그림이었다. 역시 술라웨시섬의 레앙 테동게(Leang Tedongnge) 동굴에서 발견됐다. 돼지는 얼굴에 사마귀가 그려진 것으로 보아 섬 토종인 술라웨시 사마귀돼지로 추정됐다.
동굴 벽화는 황토 같은 광물성 무기물 물감으로 그린 것이 대부분이어서 유기물인 탄소를 기준으로 하는 탄소연대 측정법이 통하지 않았다. 그리피스대 연구진은 동굴 벽화 위에 물이 스미면서 생긴 방해석 막에서 우라늄을 추출했다. 우라늄이 시간이 지나면서 방사선을 방출하고 토륨으로 변환되는 비율을 통해 연대를 측정했다.
방해석 막은 최소 4만5500년 전에 생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벽화는 그보다 더 오래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라늄 연대 측정 방법은 벽화가 그려진 암석의 일부를 부숴야 하고, 실제 작품의 제작 연대도 정확하게 판별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5만1200년 전 동굴 벽화도 2019년 네이처 논문에서는 우라늄 연대가 4만3900년 전으로 나왔다.
그리피스대 연구진은 2024년 논문에서 실제 벽화가 그려진 물감층에 더 가까운 탄산칼슘의 연대를 측정하는 기법을 썼다고 밝혔다. 분석에 필요한 암석 조각도 5㎜밖에 되지 않아 벽화 훼손도 막을 수 있었다. 연구진이 새로운 기법으로 분석한 결과 랭 카람푸앙 동굴 벽화 속 돼지 그림은 최소 5만1200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됐다.
그리피스대 연구진은 "최근 발견은 동굴 벽화가 지금까지 생각처럼 빙하기 유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류 이주 과정에서 더 오래된 시점에 시작됐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며 "현생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와 동남아시아 섬들을 지나 6만5000년 전 호주까지 도착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벽화로 남은 돼지는 나중에 사냥감에서 가축으로 발전했고, 인간을 따라 태평양 외딴섬까지 갔다. 인류가 정말 복돼지를 발견한 셈이다.
참고 자료
Science(2026),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dv4963
Nature(2024),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4-07541-7
Science Advances(2021), DOI: https://doi.org/10.1126/sciadv.abd4648
Nature(2019), DOI: https://doi.org/10.1038/s41586-019-1806-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