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신소재'로 불리는 그래핀이 연구실을 넘어 양산 단계에 진입했다. 그래핀 전문기업 그래핀스퀘어가 경북 포항 블루밸리 국가산업단지에 그래핀 필름 양산 공장을 준공하면서다. 그래핀이 국내에서 공장 설비를 기반으로 대면적·연속 생산을 시도하는 첫 사례로 평가된다.
지난달 준공식에서 조선비즈와 만난 홍병희(54) 그래핀스퀘어 대표 겸 서울대 화학부 교수는 "준공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라며 "공장 구축으로 파일럿 대비 그래핀 생산 단가를 6분의 1까지 낮출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핀은 탄소 원자가 벌집 모양으로 한 층을 이루는 물질로, 얇고도 강하면서 전기와 열을 잘 전달해 오래전부터 산업계가 주목해왔다. 이 같은 물성 덕분에 난방·조리 같은 발열 제품, 전자기기·데이터센터 방열(열 관리), 디스플레이·센서·이차전지 등의 응용처가 거론돼 왔다.
홍 대표는 국내 그래핀 연구를 이끌어온 대표 연구자로 꼽힌다. 포스텍에서 학·석·박사 학위를 마친 뒤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그래핀 분야의 석학 김필립 교수와 박사후 연구를 진행하며 그래핀 연구의 기반을 다졌다. 귀국 후 성균관대 교수를 거쳐 2011년 서울대 화학부에 부임해 대면적 합성과 전사 기술 등 산업화 연구를 이어왔다.
2012년 홍 대표가 설립한 그래핀스퀘어는 2021년 경북도·포항시와 투자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뒤 본사를 수원에서 포항으로 이전했다. 포항 공장에는 총 420억원이 투입됐고, 공장은 연면적 6308㎡ 규모다. 그래핀스퀘어는 2023년 190억원 규모의 시리즈B 투자를 유치했고, 올해 4월에는 160억원 규모의 프리 IPO 투자를 받았다.
◇ 대면적 CVD 연속 공정으로 양산
포항 공장의 경쟁력은 대면적·연속 생산이다. 그래핀스퀘어는 홍 대표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화학기상증착법(CVD) 그래핀 공정을 기반으로 양산 체계를 구축했다. CVD는 고온 환경에서 기판 위에 탄소를 고르게 증착해 고순도 소재를 얻는 방식이다.
회사 측은 파일럿 단계 대비 단가를 6분의 1 수준까지 낮출 수 있는 배경으로 생산 규모 확대에 따른 고정비의 면적당 분산, 배치 중심의 파일럿 공정에서 벗어나 라인을 연속 운전해 설비 가동률을 높인 점, 공정 내 물류·취급·검사 단계의 자동화를 꼽았다.
다만 제조원가가 낮아지는 것과 고객사가 실제로 체감하는 판매가격이 내려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양산 초기에는 고객사 품질 인증과 검사·선별 비용이 추가로 붙고, 초기 수요가 충분히 크지 않으면 원가 절감 효과가 판매가격에 즉시 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 회사는 가격 장벽이 낮아질수록 고객이 늘고, 물량이 늘수록 가동률과 수율이 개선돼 원가가 내려가는 선순환을 기대하고 있다.
홍 대표는 포항 공장을 가동하면 연간 30만㎡의 그래핀을 생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30만㎡는 축구장 면적 기준으로 약 42개에 해당하며, A4 용지로 치면 약 480만장 분량이다.
남은 과제는 수율과 시간이다. 홍 대표에 따르면 앞으로 3~4개월은 핵심 장비 반입, 이후 3~4개월은 수율 안정화가 진행된다. 여기에 고객사 품질 검증까지 고려하면 대량 납품 시점은 내년 말~2027년 초 사이로 예상된다.
◇ 삼성·LG·하이닉스·포스코도 주시
홍 대표는 그래핀이 생활 속에서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을 분야로 열을 내거나 식히는 제품을 꼽았다. 그래핀 필름을 발열체로 활용하면 면 전체가 균일하게 열을 내는 방식의 제품 설계가 가능하고, 반대로 열을 빠르게 전달·확산시키는 특성은 전자기기·데이터센터 방열 소재로도 활용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회사는 이미 그래핀을 활용한 생활가전을 앞세워 해외 전시회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대표 사례가 그래핀 라디에이터다. 얇은 그래핀 필름 면 전체가 발열체처럼 작동하며 최대 약 75도까지 열을 낼 수 있고, 기존 히터 대비 에너지 효율을 30% 이상 높였다. 이 때문에 2023년 세계 최대 IT 전시회 CES에서 최고혁신상을 받았고, 미국 타임지가 뽑은 2023년 최고의 발명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런 성과가 쌓이면서 산업계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실제로 준공식에는 정부·지자체 관계자뿐 아니라 삼성전자, LG전자, SK하이닉스, 포스코홀딩스 등 협력업체 관계자들도 참석했다. 수요처가 될 수 있는 대형 제조업체들이 그래핀을 실제 부품·제품에 넣는 단계를 주시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래핀 응용 분야는 산업 소재를 넘어 바이오로 확장된다. 홍 대표는 "그래핀을 수십㎚(나노미터, 10억분의 1m) 이하로 아주 작게 만든 형태를 '그래핀 양자점'이라고 하는데, 그래핀 양자점이 소아 치매, 루게릭병, 파킨슨병 등의 질환 기초연구에서 효과를 보일 가능성이 확인됐다"며 "그래핀 양자점도 포항에서 대량 생산할 계획"이라고 했다.
홍 대표는 그래핀 산업이 장기적으로 철강, 실리콘처럼 하나의 거대한 산업군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앞으로 20년이면 모든 가정에 그래핀 기반 전자기기가 최소한 10개 이상씩 들어갈 것"이라며 "그 기반이 포항에서 만들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포항을 '그래핀 밸리'로 선택한 이유도 장기적인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다. 그는 "포스텍이라는 최고 수준의 연구 기반과 숙련된 제조 인력을 한곳에서 연결할 수 있다"며 "이를 결합하면 카네기멜런대를 중심으로 대학과 연구, 제조가 결합한 피츠버그의 한국형 모델을 만들 수 있다"고 덧붙였다.
◇ "그래핀·소재 산업은 10년 내다보는 정책 필요"
홍 대표는 "그래핀과 같은 신소재 산업이 자라려면 국가 정책의 시야도 길어야 한다"며 정부의 인공지능(AI) 중심 산업 정책에 우려를 표했다. 그는 "요즘 분위기는 마치 모든 산업이 AI로 대체될 것처럼 흘러가지만, AI가 절대 넘지 못하는 영역이 분명히 있다"며 "AI는 일부를 대체할 수 있지만 전체를 대체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핀스퀘어는 품질 비전 검사, 불량 검출, 조리 레시피 추천 등에 AI를 적극 활용한다. 하지만 홍 대표는 "AI는 중요한 도구인 만큼 인프라 구축은 중요하지만, AI가 산업의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AI만을 국가 어젠다로 삼으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신소재 산업은 태동조차 어려운데다 소재·바이오 같은 분야 인재들이 '내 분야는 필요 없나' 하고 사기가 꺾일 수 있다"며 "철강도, 반도체도, 그래핀도 10년 이상을 내다보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홍 대표는 "포항은 공장 하나가 흔들리면 수백 명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지역 상권까지 직격탄을 맞는다"며 "이런 지역에서 필요한 건 AI 하나가 아니라 여러 산업을 함께 키우는 국가 포트폴리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