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퍼 캐스9 유전자 가위는 인류를 질병의 공포에서 해방하고 새로운 농업 혁명까지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는 유전자 교정 기술이다. 돌연변이 유전자를 간단하게 정상 형태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 조사 기관인 미국 커스텀 마켓 인사이트(CMI)는 크리스퍼 캐스9 유전자 가위 시장이 2025년 8조원에서 2034년에는 34조원 규모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김진수 KAIST 공학생물대학원 교수는 유전자 교정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그는 노벨상 수상자들이 포함된 미국 과학자들과 거의 동시에 크리스퍼 캐스9 유전자 가위 기술을 개발했지만, 인간이나 농작물과 같이 복잡한 세포에 적용할 기술에 대한 특허는 가장 먼저 출원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제2, 제3의 김진수 교수를 배출해야 과학에서 세계 선두가 될 수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지난 반세기 과학은 김 교수처럼 기초 연구를 하면서 동시에 특허도 출원하는, 이른바 파스퇴르형(型) 과학자들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연구에만 집중해야 우수한 논문을 쓸 수 있다는 기존 생각과 달리, 특허도 출원하며 응용을 같이 생각한 과학자들이 인용 횟수가 더 많은 논문을 발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초·응용 동시 추구하는 과학자가 두각
맷 마르크스(Matt Marx) 미국 코넬대 경영대학원 교수 연구진은 "논문을 발표하며 동시에 특허도 출원한 '파스퇴르 사분면' 연구자들이 한쪽만 집중한 연구자들보다 인용 횟수가 더 많고 혁신적인 특허를 생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난달 28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파스퇴르 사분면이란 개념은 미국의 정치학자 도널드 스토크스가 1997년 처음 제시했다. 과학 연구를 '근본적 이해 추구 여부'와 '실용적 목적 추구 여부'라는 두 축으로 분류하는 개념인데, 백신의 선구자인 파스퇴르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한 연구자라고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부터 인류를 구한 것도 200년 전 파스퇴르의 백신 연구 덕분이었다.
반면 주류 과학계는 기초 연구와 응용을 나눠서 생각했다. 다들 파스퇴르는 예외적인 경우이고 연구에만 집중해야 좋은 논문을 쓸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젊은 연구자가 특허에 신경을 쓰면 집중력이 분산돼 연구의 창의성과 질이 떨어질 수 있다고 봤다. 마르크스 교수는 이런 생각이 맞는지 반세기 미국 과학자들이 생산한 논문과 특허를 분석했다.
코넬대와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공동 연구진은 1976년부터 2023년까지 수백만 건의 논문과 관련 미국 특허를 분석했다. 그 결과 논문을 발표하면서 특허도 출원한 파스퇴르 사분면 연구자 68만2199명을 찾아냈다. 이들을 논문에만 집중한 순수 과학자와 특허만 낸 발명가 그룹과 각각 비교한 결과, 파스퇴르형 연구자들이 쓴 논문의 인용 횟수가 더 많고 특허의 혁신성도 높았다. 기초 연구와 응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연구자가 과학을 이끌었다는 의미다.
특히 이제 막 연구 경력을 시작한 단계에서도 파스퇴르형 과학자들이 두각을 보였다. 젊은 연구자들이 기초와 응용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이후 과학 연구의 질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논문 저자들은 "이번 연구 결과가 기초와 응용 연구 간 연구비 배분의 최적화, 학계에서 산업으로의 기술 이전 과정, 과학 기반 기업가 정신 등 여러 질문에 대한 심층적 이해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특허 소송서 한국이 노벨상 수상자보다 앞서
크리스퍼 캐스9 유전자 가위는 파스퇴르형 연구자의 강점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이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문제가 되는 유전자 DNA를 찾아가 지퍼처럼 결합하는 가이드 RNA와, 결합 부위를 잘라내는 효소 단백질인 캐스9로 구성된다. 이 기술은 박테리아에 대한 기초 연구에서 나왔다. 박테리아는 자신에게 침입한 바이러스의 유전자 일부를 표식으로 갖고 있다가 나중에 같은 유전자를 가진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바로 효소 단백질로 토막 낸다.
제니퍼 다우드나(Jennifer Doudna) UC버클리 교수와 에마뉘엘 샤르팡티에(Emmanuelle Charpentier) 독일 막스 플랑크 병원체연구소장은 크리스퍼 캐스9 유전자 가위 기술을 개발한 공로로 2020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유전자 가위를 의학과 농업에 쓸 수 있는 기술에 대한 특허는 김 교수가 앞섰다.
노벨상 수상자들이 포함된 CVC 그룹은 2012년 6월 사이언스에 연구 결과를 발표했지만, 그 내용은 세균처럼 단순한 원핵세포 수준의 실험이었다. 사람이나 동식물처럼 복잡한 진핵세포에서 실제로 작동한다는 근거는 당시 서울대에 있던 김진수 교수와,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MIT)와 하버드대가 공동 설립한 브로드연구소의 펑 장(Feng Zhang) 교수가 제시했다.
브로드연구소는 2013년 1월 3일, 김진수 교수는 1월 29일 각각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김진수 교수는 "크리스퍼 캐스9로 인간 세포에 있는 DNA를 자를 수 있음을 최초로 입증한 것이 서울대 연구팀이었다"며 "브로드연구소의 논문이 우리보다 3주 먼저 발표됐으나 다행히 특허는 2012년에 먼저 출원했다"고 밝혔다.
최근 김 교수는 13년 가까이 이어온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둘러싼 국제 특허 소송에서 승기를 잡았다. 지난 9월 중국지식재산권법원은 UC버클리의 CVC를 대상으로 제기한 특허 무효 소송에서 김 교수가 창업한 기업 툴젠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달에는 툴젠이 미국 특허청으로부터 '크리스퍼 캐스9 리보핵산단백질(RNP) 복합체의 세포 내 직접 전달' 관련 특허를 취득했다. CVC는 지난해 유럽연합(EU) 법원에서 크리스퍼 캐스9 특허를 자진 철회했다. 한국이 바이오 산업을 이끌 핵심 기술을 확보한 셈이다. 이를 두고 과학계와 업계에서는 한국 과학의 미래가 기초 연구와 응용을 동시에 추구하는 제2, 제3의 김진수 교수에게 있다는 말이 나온다.
참고 자료
Science(2025),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dx3736
Nature Biotechnology(2013), DOI: https://doi.org/10.1038/nbt.2507
Science(2013), DOI: https://doi.org/10.1126/science.1231143
Science(2012), DOI: https://doi.org/10.1126/science.1225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