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포진 백신이 노년기 치매 발병 위험을 크게 낮출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pixabay

대상포진 백신이 노년기 치매 발병 위험을 크게 낮출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치매를 확실히 예방할 방법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 의대 연구진은 영국 웨일스 노인 28만여명의 대규모 의료 기록을 재분석한 결과, 대상포진 백신을 맞은 사람이 맞지 않은 사람보다 이후 7년간 치매에 걸릴 확률이 20% 낮았다고 밝혔다. 연구 결과는 2일 국제 학술지 '셀'에 게재됐다.

치매는 전 세계적으로 약 5500만명이 겪고 있으며, 매년 1000만명 이상의 신규 환자가 발생하는 질환이다. 가장 흔한 알츠하이머 치매는 뇌에 비정상적인 단백질 덩어리가 쌓이면서 신경세포가 파괴되는 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수십 년간 과학자들은 이 단백질 변화를 치료하거나 예방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이에 최근 연구자들은 새로운 방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바이러스 감염이 치매 위험을 높일 수 있다는 가설이다. 대상포진 바이러스 역시 그 후보 중 하나다.

연구진은 영국 웨일스 주민 중 치매 진단 이력이 없는 71~88세 고령자 28만여명의 의료 기록을 7년간 분석했다. 그 결과, 백신 접종자는 비접종자에 비해 대상포진 발생 위험이 37% 감소했고, 치매 진단 위험은 20% 감소 효과를 보였다. 2020년 기준 전체 대상자 8명 중 1명이 치매 진단을 받았지만, 백신 접종군에서는 발병률이 눈에 띄게 낮았다.

연구진은 효과가 예방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했다. 치매 초기 단계로 불리는 경도인지장애(MCI) 발생 역시 접종자에서 더 적게 나타났다. 특히 이미 치매 진단을 받은 뒤 백신을 맞은 사람은 치매 관련 사망률까지 낮았다. 9년간의 추적 결과, 백신을 맞지 않은 환자의 약 50%가 치매로 사망한 반면, 백신 접종자는 약 30%만 사망에 그쳤다.

흥미롭게도 치매 예방 효과는 남성보다 여성에서 더 크게 나타났다. 연구진은 여성의 면역 반응이 일반적으로 더 강하다는 점, 대상포진이 여성에게 더 흔하다는 점 등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번 연구가 특별한 이유는 영국 웨일스에서 시행된 독특한 백신 접종 정책 때문이다. 2013년 9월 백신 물량이 부족하자 정부는 그해 79세가 되는 사람에게만 1년간 무료 접종 기회를 제공했다. 반면, 당시 이미 80세 이상이었던 주민들은 단 한 번도 접종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연구진은 생일이 불과 1주일 차이로 백신 접종 자격이 갈린 두 집단을 비교할 수 있었다. 나이, 교육 수준, 생활 습관, 기저 질환 등 거의 모든 조건이 동일한 집단이 사실상 '무작위 배정'된 형태였다. 연구진은 이를 두고 "무작위 임상시험에 매우 가까운 자연실험 조건"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정확한 이유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백신이 치매 위험을 낮추는 구체적인 작용 방식 역시 불확실하다. 연구진은 바이러스 재활성화 억제, 면역 체계 전반의 활성화, 혹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다른 생물학적 경로 등 여러 가능성을 놓고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연구진은 향후 대규모 무작위 임상 시험을 통해 백신의 치매 치료 효과를 공식 검증할 계획이다. 파스칼 겔드세처(Pascal Geldsetzer) 교수는 "이미 안전성이 검증된 주사 한 번으로 치매 예방 가능성을 시험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희망"이라며 "대규모 무작위 임상 시험을 통해 인과관계를 확정하고 싶다"고 말했다.

참고 자료

Cell(2025), DOI: https://doi.org/10.1016/j.cell.2025.1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