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타당성조사(예타) 폐지를 앞두고 정부 연구개발(R&D) 예산 체계가 대전환을 맞는다. 오태석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원장은 26일 서울 중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예타 폐지 이후 도입될 사전 기획 점검 체계와 KISTEP의 역할 강화 방향을 설명하며, 과학기술과 산업 혁신 정책을 아우르는 새로운 R&D 시스템 구축 방향을 제시했다.
KISTEP은 국가 과학기술 정책의 기획, 평가, 예산 지원 등을 수행하는 과학기술 정책 전문 싱크탱크다. 오태석 KISTEP 원장은 지난 4월 1일 취임했다.
오 원장에 따르면, R&D 분야 예타 폐지를 담은 법안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했으며, 국회 본회의에서 이르면 27일, 늦어도 12월 초 처리될 전망이다. 법안이 통과되면 공포 즉시 시행된다.
그동안 예타는 수천억원 규모의 R&D 사업을 2~3년에 걸쳐 타당성을 분석한 뒤 통과, 미통과 등으로 평가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새 체계에서는 이 절차가 사전 기획 점검 방식으로 바뀐다. 사업 기획의 완성도와 타당성을 조기에 검증해 시간과 예산 낭비를 막는다.
오 원장은 "기존 예타는 속도와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며 "사전 기획 체계로 전환되면 국가 전략기술과 신산업 분야에서 정책 대응 속도가 크게 빨라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새로운 사전 기획 점검 체계의 세부 기준은 법안 통과 후 12월 중 고시로 마련된다. 오 원장은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지에 대한 세부 내용도 거의 마무리된 상태"라며 "부실 심사에 대비해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고, 혁신본부와 외부 전문가가 함께 참여하는 구조로 운영해 투명성을 확보할 것"이라고 했다.
오 원장은 "예타가 폐지되면 과학기술혁신본부와 KISTEP이 담당해야 할 업무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며 "특히 첫 해에는 제도 전환으로 혼란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예타가 폐지되면 사업이 무분별하게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이에 대해 오 원장은 '지출 한도'라는 현실적 제약을 강조했다. 각 부처는 정해진 예산 한도 내에서 우선순위를 정해 사업을 신청해야 하며, 사전 기획 점검 결과도 국회에 보고하도록 돼 있어 예산 남발 가능성은 구조적으로 제한된다는 설명이다.
한편 이날 KISTEP은 산업연구원(KIET)과 공동 포럼을 열고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오 원장은 "이번 포럼은 취임 후 추진해온 기술 주도 성장 전략의 연장선"이라며 "과학기술과 산업 혁신 정책을 어떻게 연계하고 상호 보완할지 함께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학기술 부총리 체제 출범, R&D 예산 확대 등 환경 변화 속에서 KISTEP은 선제적으로 혁신 정책 방향을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 원장이 제시한 혁신 정책 방향은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연구자 중심을 넘어 산업 생태계를 기준으로 R&D 정책을 설계하고, 기술 스케일업 지원을 강화한다. 동시에 과학기술과 산업 혁신 싱크탱크 간 협업 체계를 구축한다.
또 민간과 대학, 출연연 협력을 확대하고, 특히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분야에서 대기업 참여를 높여 민간의 역할을 강화한다.
금융 분야의 참여 확대도 핵심 축이다. 오 원장은 "미국은 양자, 소형 모듈 원전(SMR), 핵융합 등에서 민간 자본이 고위험을 감수하며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다"며 "국내에서는 R&D와 금융 분야가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어 연결 고리를 만드는 작업부터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분 투자나 보험 등 다양한 금융 수단을 과학기술 혁신에 연결하는 방안도 함께 검토 중이다.
오 원장은 "R&D 자금뿐 아니라 규제와 인재, 금융, 공급망 같은 비R&D 정책이 함께 움직여야 기술이 산업화에서 꽃필 수 있다"며 "이를 위해 다양한 기관과 협력하겠다"고 강조했다.
오 원장은 "인공지능(AI) 등 주요 분야의 정책을 만들기 위해선 인재 흐름 자체를 정교하게 파악해야 한다"며 "내년에는 인재 분석 보고서를 기반으로 새로운 정책 제안을 내놓을 계획"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