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과학계·농업계·정부가 한자리에 모여 유전자 교정(GEO) 기술의 규제 개선을 논의한 정책 세미나에서 "한국은 기술 경쟁력은 갖췄지만 상용화 속도가 주요국에 비해 뒤처져 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GEO가 글로벌 농업과 바이오 시장을 재편하는 핵심 기술로 부상하고 있지만, 한국은 법적 분류와 규제 체계가 정비되지 않아 연구자·기업·농민 모두가 산업화의 문턱에 멈춰 서 있다는 설명이다.
20일 돼지 전문 수의사인 고상억 발라드 동물병원 원장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정책 세미나에서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산업에 진입하는 속도"라며 "한국은 사실상 출발조차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날 최수진 국민의힘 의원은 '유전자 교정 기술과 규제 혁신'을 주제로 정책 세미나를 열었다. 조선비즈는 유전자 교정 바이오산업발전협의회와 함께 공동 주관했다. 유전자 교정은 외래 유전자를 넣는 유전자변형생물체(GMO)와 달리, 기존 유전자의 일부를 수정하는 기술을 말한다.
고 원장은 세계 최초 돼지생식기호흡기증후군(PRRS) 저항성 돼지를 예로 들며 "미국은 해당 돼지의 상업화를 승인했고 유럽과 아시아 주요국도 승인할 전망"이라며 "한국은 지금 시작해도 최소 10년은 뒤처질 수밖에 없다. 이대로면 국내 종돈(종자 돼지) 시장은 외국 기업에 완전히 종속될 것"이라고 했다.
작물 분야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최성화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바이엘과 공동 개발 중인 비타민D 강화 토마토가 2028년 전 세계에 판매될 전망이지만, 한국은 GEO를 GMO로 분류해 국내 재배와 판매가 모두 금지돼 있다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GEO 산업이 열리면 식품과 필수재 분야에서 수십조원 규모의 시장이 열릴 것이라며 규제 개선을 촉구했다. 그는 "현재 가장 큰 피해자는 농민"이라며 "농민들은 새로운 품종으로 수익을 낼 기회가 있는데, 한국에서는 GEO 작물을 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이영완 조선비즈 부국장은 현행 규제가 GEO 기술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한 채 GMO와 동일한 틀에 묶어두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GEO는 외래 유전자를 넣지 않는 기술"이라며 "GMO와 동일 규제로 관리하는 건 결국 '어렵고 복잡하니 그대로 두자'는 게으른 규제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 부국장은 "영국에서 GMO 논란이 일었을 때 과학자와 언론이 참여해 팩트 기반 합의 구조를 만들었다"며 "유전자 교정 기술은 인류가 당면한 기후위기, 팬데믹, 고령화 문제에 필수적인 만큼, 한국도 정확한 정보에 기반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에 한승연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생명기술팀장은 "연구는 앞서 있는데 산업화는 어려운 현실을 정부도 인식하고 있다"며 "GEO는 합성생물학, 인공지능(AI)과 결합해 국가 전략 기술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GEO의 명확한 정의와 기준을 세우고 과학적 근거,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개선 방향을 다시 찾겠다"고 밝혔다.
최광준 산업통상자원부 바이오융합산업과장도 "산업부 차원에서도 합리적인 개선을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며 "사회적 합의나 의사소통으로 합의한 대안, 과학에 기반한 대안이 만들어지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