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대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초대 표준연 소장을 지낸 고(故) 김재관 박사의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김 박사의 배우자 양혜숙(왼쪽 셋째)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과 아들 김원준(맨 오른쪽) 삼성글로벌리서치 대표가 흉상에 손을 얹고 있다. /신현종 기자

"주위에서 김재관 박사에게 '천재'라고 할 때마다, 저는 '천재와 천치는 한 글자 차이'라고 놀리곤 했어요. 훗날 돌아보니 이분은 정말 평생 천치처럼 나라를 위해 일만 하다 가셨더라고요." 고(故) 김재관(1933~2017) 박사의 배우자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이 이렇게 말하자 장내엔 박수가 물결쳤다.

6일 오전 대전 유성구 도룡동 한국표준과학연구원(표준연·KRISS) 세종홀. 이날 표준연은 창립 50주년을 맞아 'K방산의 아버지'로 불리는 초대 표준연 소장, 김재관 박사의 흉상 제막식을 열었다.

김재관 박사는 대한민국 방산 산업 및 중공업의 토대를 닦은 인물로 꼽힌다. 1960~70년대 종합제철소 건설 계획을 맡아 포항종합제철소 설립의 산파 역할을 했고, 1972년 박격포·로켓포·대전차 지뢰 등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주문한 무기들을 국산 기술로 완성해 냈다. 한국 표준시를 도입, 한국 산업의 고도화에 이바지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정부는 김 박사를 2023년 '대한민국 과학기술 유공자'로 지정했고, 지난해 과학 기술과 한국 산업 발전을 이끈 공로로 현충원에 안장했다.

김 박사의 삶은 대한민국의 근대 변혁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3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1950년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첫 학기를 마치기 전에 6·25전쟁이 터졌고 전시 연합 대학에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대학 졸업 후인 1956년엔 서독 정부 장학생으로 선발돼 뮌헨공대로 유학을 떠났다. 기계공학·철강학·금속학·자동차공학을 공부하고 1961년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듬해엔 독일 최대 철강사 '데마그'에 입사해 제철소 설계와 건설, 특수강 생산 기술을 익혔다.

김 박사가 한국에 돌아온 건 1967년이다. 1964년 독일에서 만났던 박정희 대통령이 그를 3년 후 대한민국 제1호 해외 유치 과학자로 불러들이고, 종합 제철소 건설·설계를 맡긴 것이다. 오늘날 포항종합제철소가 탄생한 배경이다.

1972년엔 국방과학연구소 초대 총괄부소장으로 이른바 '번개 사업'을 추진했다. 자주 국방의 필요성이 절실해지자 국산 무기를 개발하고 완성한 것이다. 1973년엔 초대 중공업차관보로 자동차 산업 육성에 몰두, 현대자동차 포니(PONY) 개발을 지원했다. 양 이사장은 "남편이 자동차 산업을 육성하자고 하자 주변에선 '밥솥도 땜질해 먹는 나라가 무슨 자동차냐'고 비아냥댔지만, 남편은 '국가 발전을 위해선 꼭 이 길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1975년 한국표준연구소(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를 설립하고 초대 및 2대 소장을 맡았다. 당시 우리나라엔 '한국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시간 표준을 확립하지 못해 일본 방송국 시보를 받아 사용했다. 김 박사는 국제원자시와 협정세계시를 나타내는 시계를 확보, 대한민국 시간 표준을 구현했다. 질량·길이에서도 정밀 산업에 필수적인 표준 제도를 확립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퇴임 후엔 공직에서 물러나 인천대 기계공학부 교수와 대학원장을 지내며 후학을 양성했다. 표준 헌법 제정에도 힘썼다. 이호성 KRISS 원장은 "1980년 헌법에 '국가는 국가 표준 제도를 확립한다'는 문구가 명시된 것도 김 박사 덕"이라고 했다.

김 박사 아들인 김원준 삼성글로벌리서치 대표는 "제게 아버지는 늘 밤낮없이 자료를 펼치고 고심하며 '나라를 위해 이런 걸 해야 한다'고 말하던 분, 동시에 누구보다 다정하고 자상했던 분으로 기억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