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가장 오래 사는 포유류는 200세 이상 사는 북극고래(학명 Balaena mysticetus)이다. 어떻게 북극고래는 그 추운 북극해에서 장수를 누리는 것일까. 과학자들이 유전자에서 비밀을 찾아냈다. 암을 유발하는 유전자 돌연변이가 적고, 설사 돌연변이가 생겨도 바로 복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원래 고장도 덜 나고 망가지면 뚝딱뚝딱 고쳐가며 산다는 것이다.
미국 로체스터대 생물학과의 베라 고르부노바 (Vera Gorbunova) 교수와 안드레이 셀루아노프(Andrei Seluanov) 교수 부부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의대 유전학과의 얀 페이흐(Jan Vijg) 교수 공동 연구진은 "북극고래의 놀라울 정도로 긴 수명은 DNA 돌연변이를 복구하는 능력이 향상된 덕분임을 알아냈다"고 30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돌연변이에 취약하나 복구 능력 탁월
북극고래는 몸길이가 15~24m이고 몸무게는 80t을 넘는다. 지방 두께가 50㎝나 돼 북극해의 얼음장 바다에서 살 수 있다. DNA 유전자는 시간이 갈수록 돌연변이가 쌓인다. 이로 인해 암이 발생한다. 북극고래는 덩치가 엄청나고 수명도 길어 DNA 돌연변이도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북극고래는 암과 같은 노화 관련 질환에 잘 걸리지 않는다. 연구진은 그 비밀을 고래 세포에서 찾았다. 손상된 DNA를 복구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저온 활성화 단백질이다.
북극고래는 연구하기 힘든 동물이다. 거대한 동물이라 실험실에서 키우며 관찰할 수 없다. 무엇보다 멸종 위기종이어서 야생에서 연구하기도 쉽지 않다. 연구진은 북극 원주민인 이누이트의 도움을 받았다. 매년 가을이 되면 알래스카 북부에 사는 이누이트들은 정부 허가를 받고 북극고래를 사냥한다. 이누이트는 1000년 이상 북극해에서 고래를 사냥했다.
로체스터대 연구진은 이누이트들이 잡은 북극고래에서 시료를 채취하고 실험실에서 북극고래 세포를 배양했다. 처음에는 고래가 오래 사는 것은 암에 대한 저항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예상과 달리 고래 세포가 암세포로 바뀌는 데 필요한 발암 돌연변이 수는 인간 세포보다 적었다. 암이 생기는 데 필요한 돌연변이 문턱이 인간보다 낮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고래는 암에 잘 걸리지 않는다. 연구진은 발암 돌연변이가 북극고래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원래 낮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특히 고래 세포는 손상된 DNA를 복구하는 능력도 더 뛰어났다. 돌연변이가 생기면 암에 취약한 고래지만, 그런 돌연변이가 생기는 일을 원천 봉쇄하는 셈이다.
연구진은 북극고래 세포에서 손상된 DNA를 복구하는 데 CIRBP 단백질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이 단백질은 북극고래가 사는 얼음 바다와 같은 저온 환경에서 작동한다. 북극고래는 이 단백질이 사람보다 100배나 많았다. 인간 세포에 CIRBP를 생성시키자 DNA 복구 능력이 향상됐다. 이 단백질을 초파리에 발현시키자 수명이 늘어났다. DNA 돌연변이를 유발할 수 있는 방사선에 대한 저항성도 높아졌다. 초파리는 작은 곤충이지만 인간과 유전자를 60% 공유해 생물학과 의학 실험에 많이 쓴다.
중국 퉁지대의 마오 즈용(Zhiyong Mao) 교수는 이날 네이처에 "북극고래가 극도로 장수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며 "이번 연구는 유전자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DNA 복구 메커니즘이 극단적인 장수를 가능케 하는 매우 효과적인 전략임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마오 교수는 고르부노바, 셀루아노프 교수의 제자이다.
◇육지 두더지쥐의 장수 비결과 상통
DNA 복구 능력이 장수 비결이라는 사실은 육지에 사는 장수왕에게서도 확인됐다. 바로 땅속에 사는 벌거숭이두더지쥐(학명 Heterocephalus glaber)이다. 아프리카 동부 지역에 사는 이 동물은 몸길이가 8~10㎝에 몸무게는 30~35g이고, 이름 그대로 털이 거의 없다. 겉보기에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놀랍게도 수명이 32년으로, 같은 크기의 다른 쥐보다 10배 이상이다. 사람으로 치면 800세 이상 사는 것이다.
마오 교수는 지난 10일 사이언스에 "벌거숭이두더지쥐의 장수 비결은 외부 침입자를 감지해 면역 반응을 유발하는 효소인 cGAS(고리형 GMP-AMP 합성효소)에 생긴 돌연변이 덕분임을 알아냈다"고 발표했다.
cGAS는 세포핵 밖에서 암이나 바이러스의 DNA를 감지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cGAS가 세포핵 안에서는 정반대 모습을 보인다. 인간과 생쥐에서는 DNA 복구를 억제해 유전자 돌연변이와 암 발병 위험을 높이는 것으로 밝혀졌다. 반면 벌거숭이두더지쥐에서는 이 효소에 돌연변이가 생겨 정반대로 암을 막는 역할을 했다. 말썽꾸러기가 효자로 변신한 셈이다.
고래와 두더지쥐의 DNA 복구 능력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할 수도 있다. 어쩌면 300살이 넘은 북극고래가 있을지도 모른다. 호주 연방과학산업연구기구(CSIRO) 연구진은 지난 2019년 국제 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북극고래의 평균 수명은 268년이라고 발표했다.
연구진은 척추동물 252종의 유전자를 분석해 이 중 수명과 관련된 유전자 42개를 발견했다. 이를 바탕으로 동물의 수명시계를 만들었더니 북극고래의 수명은 기존 예상보다 57년 더 긴 268년 동안 살 것으로 예측됐다.
마오 교수는 "북극고래의 장수에 이바지하는 CIRBP가 인간에게도 도움이 될지 이해하려면 이 단백질의 작용 원리를 밝힐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면서도 "전체적으로 이번 연구 결과는 장수와 암 예방에 있어 DNA 복구의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고르부노바 교수는 "이번 연구의 핵심 메시지는 우리에게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점"이라며 "연구가 발전하면 인간의 DNA 복구 능력도 향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참고 자료
Nature(2025),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5-09694-5
Science(2025). DOI: https://doi.org/110.1126/science.adp5056
Scientific Reports(2019), DOI: https://doi.org/10.1038/s41598-019-54447-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