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암 치료의 판을 바꾼 CAR-T세포 치료가 고형암까지 정복할 길이 열렸다. 스위스 로잔연방공과대학(EPFL)과 로잔대학병원(UNIL-CHUV) 공동 연구진은 "암세포 주변의 신호를 스스로 감지해 고형암까지 공략할 수 있는 '스마트 T세포'를 설계했다"고 28일(현지 시각)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이날 국제 학술지 '네이처 바이오메디컬 엔지니어링'에 실렸다.
CAR-T세포는 환자의 몸에서 추출한 T세포에 '키메라 항원 수용체(CAR)' 유전자를 주입한 형태다. 그리스 신화에서 여러 동물의 모습을 가진 동물로 나오는 키메라처럼, 면역세포인 T세포가 암세포 표면의 항원과 결합하는 단백질도 가졌다는 것이다. 전투병이 적군을 찾는 정찰병 능력까지 겸비한 셈이다.
CAR-T세포는 한 번 몸에 넣어주면 증식하면서 계속 암세포를 죽인다고 '살아있는 약물' '암세포의 연쇄 파괴자(serial killer)'로 불린다. 다만 지금까지 CAR-T세포 치료제는 모두 림프종이나 다발성 골수종 같은 혈액암 치료제로만 승인받았다. 폐암이나 유방암처럼 장기에서 덩어리를 이루는 고형암에서는 성과가 미미했다.
문제는 암세포 그 자체보다 암을 둘러싼 환경, 즉 '종양 미세환경(TME)'에 있었다. 종양 주변에는 각종 세포와 단백질이 뒤얽혀 있는데, 이들이 내보내는 신호는 대체로 면역세포를 무력화한다. 혈액암이라는 탁 트인 전장에서 맹활약하던 CAR-T가, 고형암이라는 미로 한가운데 들어가면 길을 잃고 헤매는 이유다.
연구진은 T세포가 스스로 길을 찾지 못한다면, 미세환경의 신호를 해석해 유리한 신호로 바꾸는 감각기관을 얹자는 아이디어를 고안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T센서(T-SenSER, TME-sensing switch receptor)', 즉 종양 미세환경 감지 스위치 수용체이다.
T센서는 암이 보내는 신호를 역이용한다. 종양이 성장하거나 면역을 회피하려고 내보내는 단백질을 감지해, T세포에 더 싸우라는 신호를 보내는 식이다. 연구진은 기존 CAR-T세포에 T센서를 결합해 시험했는데, 핼액암인 다발성 골수종은 물론 고형암인 폐암에 걸린 실험동물에서도 항암 효과가 높아졌다.
연구진은 두 가지 T센서를 개발했다. 각각 종양의 혈관 생성을 유도하는 단백질과 면역 억제 환경을 조성하는 단백질을 감지한다. 연구진은 두 가지 단백질을 포착하는 수용체를 18가지 조합으로 설계해, 컴퓨터 시뮬레이션(모의실험)과 실험을 통해 최적안을 골랐다.
물론, 이번 성과가 곧바로 환자 치료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고형암은 혈액암보다 훨씬 복잡하고, 환자마다 종양 미세환경의 구성도 다르다. 하지만 T센서가 열어준 문은 분명하다. 암의 언어를 해독하고, 그 언어로 받아치는 자율형 면역세포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참고 자료
Nature Biomedical Engineering(2025), DOI: https://doi.org/10.1038/s41551-025-015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