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첨단기술인 '레드 테크(Red Tech)'가 무서운 속도로 세계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이미 우리 실생활 속에도 깊이 스며들었다." 지난 13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정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중국발 첨단 기술이 한국을 압도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국감에서 중국발(發) 첨단기술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묻는 질문이 잇따라 나왔다. 인공지능(AI), 로봇, 반도체 등 전략 산업 전반에서 중국이 글로벌 표준을 위협하는 동안, 한국은 인재 유출과 제도적 한계로 뚜렷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성공에서 '속도와 집중'을 배우고, 한국의 연구 거버번스와 평가·보상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중앙집권적 체계가 확보한 '정책 연속성'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한국과 중국의 기술 격차는 0.3년이었다. 중국이 4개월이면 한국의 산업 기술 수준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업계는 이 격차는 이미 한참 전에 좁혀졌다고 말한다. 특히 반도체 기술의 기초 역량은 한국이 중국에 크게 밀린다는 의견이 많다.
실제로 중국은 2016년~2021년 반도체 기술 관련 피인용 상위 10% 논문 수에서도 미국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이 가장 많은 논문을 내놨던 HBM(고대역폭메모리) 연구 논문 수에서도 1위를 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중국은 몇 년째 미국보다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있고, 젊은 세대 사이에서 과학자를 선호하는 문화가 있다"며 "국가 전략과 제도, 개인 동기가 함께 맞물리며 발전에 속도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시진핑 정부는 2013년 이후 세 차례 거버넌스 개편을 거쳐 중앙집권형 과학기술 의사결정 체계를 완성했다. 특히 2023년에는 정책 결정 구조를 당 중심으로 전환해 중앙과학기술위원회가 전략기술을 직접 지휘하게 했다. 과학기술부는 집행 기관으로 재편했다.
중앙과학기술자문위원회는 정책 기획과 조정 기능을 수행하며, 과학·공학·사회과학 전문가가 핵심 정책안을 마련하고 최종 결정은 당이 내린다. 덕분에 국가 차원의 장기 전략 수립과 연구·산업 투자가 단절 없이 빠르게 집행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은 중앙집권형 체계를 기반으로, 국가실험실 중심의 다층적 연구 생태계를 운영하고 있다. 국가실험실은 핵심기술 자립과 산업 현대화를 이끄는 거점으로, 중앙정부가 인재와 연구개발 자금을 직접 관리한다. 기초과학, 6G(6세대 이동통신), 양자정보, 반도체 등 '국가 중대기술' 분야가 집중 지원 대상이며, 현재 약 20개가 운영 중이다. 지난해 중국의 총 연구개발(R&D) 투자는 3조6326억8000만 위안(약 715조원)에 이른다.
◇인재 키우고 끌어들이는 중국, 뺏기는 한국
지난 8월 3일, 중국 국영 CCTV는 공산당 서열 5위인 차이치(蔡奇) 중앙서기처 서기가 베이다이허에 모인 과학기술 분야 전문가들을 찾아 격려했다고 보도했다. 박병광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정치 원로와 권력 핵심부가 은밀히 회의를 하던 장소에 과학자와 기술 전문가들이 초청된 것"이라며 "이는 곧 과학기술 인재를 국가 발전의 심장부로 인식하고 있다는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과학기술을 '국가 핵심 자산'으로 격상한 중국은 제도 개혁과 함께 인재 육성에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1990년대 후반 고등교육 확대 정책으로 이공계 중심의 인재 풀을 확대한 결과, 2023년 신규 박사 학위자의 약 60%가 이공계 출신이 됐다. 이렇게 배출된 인재들은 곧바로 민간 테크기업으로 흡수된다. ICT(정보통신기술) 대기업인 화웨이는 2024년 기준 전체 인력 20만9000명 중 54%를 R&D 인력으로 채용했다.
정부가 나서서 대학·연구기관 육성 정책도 펼쳤다. '211·985 공정'과 '쌍일류 정책'을 통해 핵심 연구중심대학과 지역 특화 연구를 집중 지원했다. 해외 인재 유치에도 적극적이다. '천인계획', '만인계획', '해외우수청년 프로젝트', '치밍계획'을 통해 박사급, 40세 이하 연구자의 귀환과 창업을 장려했다. 지난 9월에는 'K비자'를 신설해 기업 스폰서 없이도 초기 경력 연구자가 중국에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반면 한국은 오히려 인재를 뺏기고 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더불어민주당 정일영 의원실에 따르면, 서울대와 4대 과학기술원 정교수 61.5%가 최근 5년간 해외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고, 그중 82.9%가 중국 기관에서 온 것으로 조사됐다. 실제 중국으로 옮긴 교수들도 나왔다. 올해 송익호 한국과학기술원(KAIST) 명예교수가 중국 청두전자과학기술대 연구소로 부임했으며, 지난해에도 국내 주요 연구 인력이 잇따라 중국으로 이동했다.
◇"장기 축적과 단기 대응 병행 전략 가능"
정부는 심각성을 인식하고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켜 2030년까지 순유입 500명을 목표로 비자, 주거, 교육, 취업 등 전주기 정착 지원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4일 국무회의에서는 해외 우수 인재 유치 활동 홍보에 쓸 51억2000만원 규모 예비비 지출안도 의결됐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근본적 대책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이혜진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정권 교체 때마다 과학기술 전략이 단절되고, 부처별·단계별로 예산이 분산돼 장기적 계획 실행이 어렵다"고 말했다. 기초 연구에서 응용·현장 적용·양산으로 이어지는 전주기적 연결도 매끄럽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연구원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기 축적과 단기 대응을 병행하는 이중 전략을 제안했다. 그는 "장기 전략으로는 5~10년 단위 핵심 임무 목록을 고정하고, 정권 교체 시 승계·보정·종료 계획을 공개하도록 해야 한다"며 "단기 전략으로는 현안에 대응하는 6~24개월 단위 신속 임무 트랙을 운영하고, 규모와 종료·확대 규칙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원은 연구개발 성과가 빠르게 산업기술로 발전할 수 있도록 보상 체계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단순히 특허와 기술이전만 보상할 게 아니라 상용화에 필수적인 표준 제정과 시범 적용까지 성과 보상을 확대하고, 일부 성과금은 현장 검증과 양산 전환에 재투자하도록 재원 구조를 정비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