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나 추락과 같은 외상으로 발생하는 척수손상은 환자에게 운동·감각 기능의 영구적 상실을 초래할 수 있다. 뇌와 온몸을 잇는 척수에 손상의 회복을 막는 '제동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국내 연구진이 이 제동장치가 작동하는 분자 수준의 원리를 처음으로 밝혔다.
이창준 기초과학연구원(IBS)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장과 하윤 연세대 의대 교수 공동 연구진은 "척수의 별 모양 성상교세포가 마오비(MAOB) 효소를 통해 생성하는 억제성 신경전달물질 '가바(GABA)'가 손상된 척수의 회복을 방해하는 핵심 원인임을 규명했다"고 11일 밝혔다.
연구진은 마오비 억제제의 회복 효과를 입증함으로써 약물을 통한 척수손상 치료 가능성도 제시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이날 국제 학술지 '신호 전달 및 표적 치료(Signal Transduction and Targeted Therapy)'에 게재됐다.
척수 손상이 회복되기 어려운 이유는 손상 부위에 형성되는 '교세포 장벽(glia barrier)'에 있다고 알려졌다. 신경 교세포는 신호를 전달하는 신경세포에 필요한 물질을 공급하는 후방의 지원부대와 같다. 교세포 장벽은 손상 직후 성상교세포를 비롯해 여러 교세포들이 급격히 증식해 상처를 두껍게 둘러싼 것을 말한다.
교세포 장벽은 초기에는 손상 부위를 보호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경이 다시 자라나는 데 방해가 된다. 그러나 이 장벽이 신경 손상 회복을 가로막는 정확한 메커니즘은 분자 단위에서 밝혀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척수손상 치료는 주로 염증을 억제하거나 증상을 완화하는 데 그쳤다.
연구진은 앞선 연구에서 반응성 성상교세포가 마오비를 통해 가바를 비정상적으로 생성하고, 이것이 알츠하이머병 같은 퇴행성 뇌신경질환을 악화시킨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연구진은 이번에 손상된 척수의 성상교세포를 분석해 가바가 신경세포 재생에 필요한 신경성장인자(BDNF)와 그 수용체(TrkB)의 발현을 억제한다는 것을 밝혔다.
이를 통해 손상 후 회복에 필요한 신경 성장 신호가 차단되면서 신경섬유의 재생과 기능 회복이 중단됐다. 즉 마오비에 의해 가바가 생성되는 경로가 척수손상의 회복 과정을 멈춰 세우는 제동장치로 작용하는 것이다.
연구진은 척수의 성상교세포에서 마오비의 발현을 억제하거나 활성화한 실험동물 모델을 이용해 척수손상 후 회복 과정을 비교했다. 분석 결과, 마오비 발현을 억제한 쥐는 손상된 신경섬유가 다시 자라나고, 뒷다리 운동 기능이 크게 회복됐다.
반대로 마오비 발현이 증가한 쥐에서는 척수 단면적이 정상 대비 절반 가까이 줄어드는 심각한 손상이 나타났으며, 운동 기능도 거의 회복되지 않았다. 마오비-가바 경로가 척수손상의 회복을 막는 직접적 원인임을 보여준다.
이어 마오비 억제제 'KDS2010'을 척수손상 동물에 투여해 효과를 확인했다. 약물을 투여한 쥐는 사다리 걷기 시험에서 뒷다리 미끄러짐이 줄어드는 등 보행 능력이 크게 개선됐고, 손상 부위에서 신경섬유가 새롭게 뻗어 나왔다.
인간과 유사한 영장류에서도 손상 조직 손실이 현저히 줄고 신경이 보존되는 효과가 확인됐다. 특히 건강한 성인을 대상으로 한 임상 1상 시험에서 약물의 우수한 안정성과 내약성이 검증됐다. 내약성은 환자가 약물 투여로 나타나는 부작용과 불편감을 견디는 정도를 말한다.
하윤 연세대 의대 교수는 "KDS2010은 이미 임상 1상 시험에서 안정성이 확인된 약물로, 임상 2상 시험을 통해 실제 척수손상 환자에서 치료 효과를 검증할 계획"이라며 "마오비-가바 경로가 다른 신경질환에 관여하는지를 밝혀 적용 범위를 넓히고, 보다 정밀하고 복합적인 치료 플랫폼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