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추진한 가상현실(VR) 콘텐츠 제작 도구 국산화 사업에서 연구원이 기존 기술을 성과물로 포장해 제출하고, 관련 사업에서도 부정이 잇따른 사실이 감사 결과 드러났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감사위원회가 지난 24일 공개한 종합감사 결과에 따르면, ETRI는 2015년부터 8년 동안 357억 원을 들여 추진한 '국산 VR 엔진 및 저작도구 개발 사업'에서 연구 윤리를 위반한 정황이 확인됐다. 감사위는 이에 따라 ETRI에 관련자 징계를 요구했다.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해당 사업은 한 민간 기업이 자체 보유한 VR 엔진 소스코드를 ETRI에 제공하면서 진행됐다. 사업 책임자인 A책임연구원은 이 외부 소스코드를 활용해 만든 도구를 마치 자체 개발한 것처럼 '다누리 VR'이라는 이름으로 ETRI 홈페이지에 성과물로 공개하고 연구개발 실적으로 제출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다누리 VR'로 제작했다고 보고된 5개 콘텐츠 중 3개는 실제로는 외국산 VR 엔진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국산화를 명분으로 한 사업이 외산 기술에 의존한 것이다.
해당 연구원은 소속 부서의 연구연수생에게 과제를 따낼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기도 했다. 연구 경험이 불과 2개월에 불과한 이 연수생은 공동연구기관의 용역을 따내 VR 관련 사업 3건을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이 외에도 이 연구원은 공동연구기관인 한 기업 대표가 뇌물을 제공하려는 정황을 알고도 관련 사실을 신고하지 않고, 해당 기업이 과제에 계속 참여하도록 방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로 인해 해당 기업은 약 11억 원의 사업비를 지원받았다.
감사위원회는 해당 연구 책임자에 대해 중징계를 요구하는 한편, 연구부정행위에 대해 법적 검토와 추가 조치를 취하라고 ETRI에 통보했다.
감사위는 ETRI의 또 다른 사업인 '테라헤르츠 기반 대인 신발 보안검색 시스템 개발'에서도 예산이 부당하게 집행된 사실을 확인했다. 2021년 시작된 이 사업은 약 212억 원의 예산으로 신발을 벗지 않고 보안 검색을 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2023년 평가에서 '극히 불량' 판정을 받아 사업이 중단됐다. 협약해지 전까지 실제 집행된 정부 지원 개발비는 134억8700만원으로, 사업 전담 기관은 ETRI에 제재부가금 1억4590만원을 처분 통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