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출연연구기관이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으로 만든 기술이나 제품을 서비스로 만들어 시장에 판매하는 것을 기술사업화라고 한다. 한국의 기술사업화율은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다. 조선비즈는 기술사업화 확산을 위해 성공적으로 기술이전이나 창업을 한 사례를 소개하고, 제도 개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R&D 금맥을 캐라'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500mL 생수 한 병을 2억5000만원에 판매하는 회사가 있다. 바로 큐토프이다. 물론 단순한 물이 아니다. 이 제품은 동위원소 중 하나인 산소-17을 90%까지 농축한 특수한 물이다. 동위원소는 원자번호는 같지만, 중성자 수가 달라 질량이 다른 것을 말한다. 큐토프는 이 작은 차이를 이용해 다양한 곳에 쓰이는 동위원소를 만드는 전문업체이다.
원자는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로 구성된다. 원자핵에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있는데, 양성자의 수는 변하지 않으며 원자번호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원자번호 1번인 수소는 양성자가 1개, 원자번호 8번인 산소는 양성자가 8개다.
반면 중성자의 수는 변할 수 있다. 가장 흔한 산소-16은 중성자 8개를 가지지만, 동위원소인 산소-17은 9개, 산소-18은 10개가 있다. 같은 원소이지만 중성자의 수가 다르면 물리적 성질이 변한다. 동위원소는 화학적 성질은 같지만, 밀도, 끓는점, 방사성 여부 등의 물리적 특성이 다르다.
동위원소는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반도체 산업에서는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가 중수소를 사용하고, 의료 산업에서는 전립선암 치료제 플루빅토(Pluvicto)의 원료로 루테튬-177이 활용된다. 최근 정부에서 추진 중인 소형모듈원자로(SMR)에도 방사성 동위원소가 필요하다. 다양한 산업에서 활용되지만 생산이 어려워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큐토프는 국내 동위원소 시장에 도전장을 던진 스타트업이다. 정도영 큐토프 대표는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30년 넘게 연구자로 일했다. 큐토프는 기존 기업들이 사용하고 있는 원심 분리, 증류 등의 기술 대신 자체적인 레이저 동위원소 분리 기술을 활용해 산소-17, 산소-18 등을 만들었다.
2022년 첫 투자인 시드 펀딩을 시작으로 2023년 pre-A, 2024년 시리즈 A 투자까지 유치하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올해는 창립 4년 만에 세종시에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동위원소로 창업에 나서서 상용화까지 성공한 셈이다.
지난 2월 25일 대전 유성구의 큐토프 본사에서 정 대표를 직접 만났다. 30년 연구원 생활을 접고 사업가로 제2의 인생에 나선 이유는 뭔지, 연구원에서 대표로 변신하면서 맞닥뜨린 난관은 무엇이었는지 들었다.
-30년 연구원 생활을 접고 창업에 나섰다.
"원래는 창업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사회에 첫발을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내디뎠고, 1988년에 대전으로 와 연구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레이저 동위원소 분리를 연구했다. 한 분야에서 30년 넘게 R&D를 수행한 건 굉장히 드문 경우다."
-어려움은 없었나.
"원래는 2012년 연구소 기업으로 창업했다. 당시 산소-18 농축수가 세계적으로 공급 부족 사태를 겪고 있었다. 한 바이오 기업 대표가 방사성 의약품을 제조해 병원에 공급하면서 한국에서도 산소-18 농축수를 생산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국내에서 관련 기술을 보유한 기업을 찾다가 나를 만나게 됐다. 이후 연구를 진행하던 중 자금 조달 같은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 연구소 기업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결국 내가 직접 사업을 인수해 창업에 나서기로 했다. 이대로 모든 것이 사라질 것 같아 깊이 고민했지만, 내 운명이라 생각했다."
-기술 이전 대신 기술 창업을 선택한 이유는.
"기술 이전은 제3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하지만 창업하면 내 모든 것을 걸고 해야 한다. 때로는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다. 기술 이전은 한 발 벗어난 입장에서 난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지만, 창업은 전쟁과 같다. 하루하루가 치열하다. 출연연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기술을 이전하고 가끔 왔다 갔다 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직접 해라, 기술 이전만으로 상용화에 성공하는 것은 어렵다'고 조언한다."
-동위원소라는 어려운 아이템을 잡았지만, 성공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기술 사업화를 하려면 R&D 주제를 어떻게 선정할 지부터 고민해야 한다. 남들보다 뛰어난 기술력을 확보하는 게 쉽지 않다. 그리고 한 우물을 파는 것이 중요하다. 산소-18과 탄소-13은 2010년부터 연구 단계에 있었다. 현재 해외의 경쟁 기업들도 레이저 동위원소 분리 기술을 시도하고 있지만, 상용화에 성공한 기업은 큐토프 뿐이다. 그리고 사업화를 위한 환경이 잘 갖춰줘 있어도 결국 사람이 중요하다. 모든 일은 사람이 해야 한다. 얼마만큼 능력 있는 그리고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팀을 구성하는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나라 창업 환경은 어떠한가.
"창업하고 나니 한국의 스타트업 투자 시장이 생각보다 잘 갖춰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투자 시장 엑셀러레이터나 벤처캐피탈이 많이 선진화돼 있는 것 같다. 아이템이 훌륭하고, 창업자의 능력이 인정받는다면 투자받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회사에 투자한 한 벤처캐피탈은 처음 만나 대화하는 자리에서 바로 투자 결정을 내렸다. 예상보다 쉬운 과정이었다. 팁스를 비롯한 정부 지원 프로그램도 매우 훌륭하게 운영되고 있다. 우리 회사도 일반 팁스 프로그램을 통해 2년 동안 5억 원을 지원받았고, 이를 탄소-13 R&D에 투자했다."
-기술 사업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실용화되지 않는 기술은 의미가 없다'는 말이 있다. 나 역시 R&D의 목표는 기술 상용화이며, 최종 완성은 사업화라고 생각한다. R&D를 시작을 했으면 성공이든 실패든 사업화까지 시도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은가. 최근에 우리가 뻔히 알고 있는 기술이었지만, 이게 비즈니스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경우를 봤다. 실리콘밸리에서는 농축수를 활용해 신체 대사를 측정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이 등장했다. 이 기술 자체는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이를 서비스화해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것이다. 우리도 기술을 실용화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출연연에서 창업하면서 어려웠던 점이나 개선해야 할 부분은 없나.
"스타트업 지원 환경이 잘 갖춰져 있지만, 제조업 기반 창업에서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 지금은 임대 공장을 운영 중인데, 설비를 확장할 공간이 없다. 공장을 짓고 싶어도 산업단지 내 토지 확보가 어렵다. 외국 기업에는 20~30년 장기 임대를 제공하면서 국내 스타트업에는 지원이 없다. 인구 분산 정책이라고 해서 수도권에서 내려오는 기업에는 혜택이 많지만, 지역에서 창업한 기업에는 지원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대전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다. 땅값이 비싸서 내 의사와 관계없이 이전을 고려해야 한다.
중소기업 연구 인력 지원 제도도 활성화돼야 한다. 현재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연구원들을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에 파견하는 제도가 있는데, 연봉 지원이 너무 적다. 더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이걸 통해 연구하고 실제 산업 분야의 취약점 등을 소통을 통해 알게 되지 않나. 그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다."
-제도적인 부분에서 개선이 필요한 건 없나.
"과기정통부가 주관하는 R&D 평가에서도 상용화 쪽에 더 높은 배점을 줘야 한다. 만약 부처 간 역할을 나눈다면, 기초 연구는 과기정통부, 산업부는 R&D, 중소기업부는 사업화 등으로 이어달리기 방식이 도입돼야 한다."
-회사의 중장기적 목표는.
"회사를 안정화하고 정상화한 뒤,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면 2선으로 물러날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 탄소-13을 성공적으로 시장에 출시하고 IPO를 추진하는 것이 목표다. 2028~2029년을 예상하며, 이를 위해 전사적으로 매진하고 있다.
큐토프는 새로운 기술을 사업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기존 동위원소 분리 기술이 우라늄 농축이나 핵무기 개발과 연관되었던 것과 달리, 큐토프는 산업적 활용을 목표로 하고 있다. 동위원소가 다양한 산업에서 핵심 소재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앞으로는 동위원소 분리 기술을 넘어 양자 산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