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초 한 과학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을 놓고 과학자 커뮤니티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구독자만 237만명에 달하는 이 유튜브 채널에서는 '과학을 보다'라는 과학 토크 콘텐츠를 운영하고 있는데, 100번째 에피소드를 기념해 15명의 과학자를 불러 여러 주제로 토론을 진행했다. 그런데 여러 과학 분야를 대표해 출연한 15명의 과학자가 모두 남성이었다.
이 영상 댓글에는 젠더 다양성 부족을 지적하는 글과 함께 부를 만한 여성 과학자나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없는 걸 어떡하냐는 글이 함께 달렸다. 그러자 한 여성 과학 커뮤니케이터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대중 강연도 잘하는 여성 과학자/커뮤니케이터 리스트'를 올리기도 했다. 영상에 출연한 한 남성 과학자도 "여성 과학자들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이 유튜브 영상과 이를 둘러싼 논란은 한국 과학기술계의 현재를 보여주는 하나의 거울이다. 남성 과학자들이 전면에 서서 대중의 관심을 받고, 여성 과학자에게는 충분한 기회가 제공되지 않는다.
2월 11일은 세계 여성과학인의 날이다. 여성과 소녀들이 과학기술계에서 동등한 참여와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유엔이 제정한 기념일이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지만, 한국 과학기술계에서 여전히 유리천장은 견고하다. 한국의 여성 연구자 비율은 2021년 기준으로 22.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다.
◇여성 연구자 비율…신입에선 32%, 책임자급에선 8.8%
한국의 여성 연구자 비율이 처음부터 낮은 건 아니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에 따르면, 신입 연구자 가운데 여성 비율은 32.1%지만, 직급이 올라갈수록 이 비율이 낮아지는 게 문제다. 일반 재직자 가운데 여성 비율은 22.7%, 보직자 가운데 여성 비율은 12.5%다. 책임자급에서는 8.8%까지 낮아진다. 육아를 비롯한 여러 이유로 중도 포기하는 여성 연구자가 적지 않은 것이다.
남녀 비율의 격차가 가장 큰 시점은 결혼, 임신, 출산과 맞물리는 35~39세다. 해당 연령대에서 자연공학계열 남성과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 격차는 31.3%P에 달한다. 이는 경력 단절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여성 연구자들이 연구를 지속하기 어려운 현실을 반영한다. 문애리 WISET 이사장은 "임신과 출산, 육아와 연구를 병행하기 어렵고, 과학기술 분야의 발전 속도가 빨라 경력 단절 이후 재진입이 쉽지 않다"며 "이코노미스트의 유리천장 인덱스에 따르면, 한국의 젠더 갭은 OECD 국가 중 꼴찌인데 이를 해소하려면 134년이 걸릴 것이라고 한다"고 지적했다.
강윤철 WISET 차세대 위원장은 "박사과정 재학생은 보통 초등학생 자녀가 있는데, 이런 육아기 대학원생의 경우 퇴근 이후 육아에 집중할 수 있는 직장인과 달리 연구와 육아를 함께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크다"며 "능력도 뛰어나고 연구도 잘하는 학생들이 출산과 육아로 인해 모든 걸 중단해야 하는 상황들이 아쉽다"고 말했다.
◇여성 연구자 참여 늘면 연구의 질도 좋아진다
해외에서는 과학기술계의 유리천장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까. 지난 6일 서울시티타워빌딩에서 네이처 인덱스와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관계자가 모여 과학기술계의 젠더 혁신 방안을 논의했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Nature)가 운영하는 네이처 인덱스는 작년 8월 한국 특집호에서 "연구 자금과 리더십에서 성별 불평등은 한국이 직면한 심각한 문제"라며 "여성 연구자의 채용과 유지, 승진을 위한 정책은 국가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과제"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날은 그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라운드 테이블에 참석한 해외 연구자들은 여성 연구자에게 기회를 확대하는 건 혜택을 주는 게 아니라 연구의 질을 높이기 위해 꼭 필요한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캐시디 R. 스기모토 미국 조지아공대 교수는 "여성 연구자는 연구에서 젠더를 고려하는 경향이 높다"며 "여성 연구자가 많아질수록 성과 젠더 통합 연구가 자연스럽게 증가할 것이며, 이는 젠더 혁신을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성과 젠더 통합 연구는 연구의 전 과정에서 성과 젠더 차이를 고려해 보다 포괄적이고 신뢰도 높은 과학적 결과를 도출하는 접근 방식을 의미한다. 이는 연구 대상 선정, 실험 설계, 데이터 분석, 연구 결과 해석 등에서 젠더 차이를 반영함으로써 연구의 정확성과 적용 가능성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예를 들어, 의학 연구에서 젠더에 따른 약물 반응 차이를 고려하지 않을 경우, 특정 젠더에게 부적절한 치료법이 제공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승인한 의약품 중 상당수가 여성에 대한 임상 시험이 부족해 부작용이 더 크게 나타나는 문제가 보고된 바 있다. 또한 인공지능(AI) 알고리즘이 남성 중심의 데이터로 학습될 경우, 여성에게 불리한 의료 진단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여성의 연구 참여 확대는 한국에서도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고 있다. 글로벌 공동 연구가 늘어나면서 국내 연구자가 해외 연구기관의 펀딩을 받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한국이 올해부터 참여하는 유럽연합(EU)의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호라이즌 유럽은 연구비를 지원하는 연구 과제를 선정할 때 여성 연구자의 비율 같은 성별 특성을 살핀다. 여러 국제 학술지도 논문 제출 시 연구 설계에서 성과 젠더를 고려했는지 여부를 명시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양정모 한국연구재단 프로그램 오피서는 "현재 한국의 연구 펀딩 제도에서는 여성 연구자 지원 정책이 일부 시행되고 있지만, 젠더 통합 연구를 촉진하는 연구비 배분 정책은 아직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김혜진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선임연구원도 "성과 젠더 통합 연구가 연구의 질을 높이는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연구 평가에서 이를 반영할 명확한 지표가 부족하다"며 "과학 연구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라도 성별 분석이 포함된 연구를 장려하고 평가하는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여성 과학자 롤 모델 필요…출산·육아 지원도 확대해야
저출산, 고령화와 의대 선호 현상이 맞물리면서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분야의 인력난은 현실이 되고 있다. 출산과 육아 같은 문제로 연구 현장에서 이탈하는 여성 인력을 지키는 건 젠더의 관점을 떠나 국가 경쟁력의 차원에서 시급한 이슈다. 문애리 이사장은 "자연, 공학 계열에서 경력 단절 여성의 규모가 거의 18만명에 달하는데, 이런 인력 손실을 줄이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다양한 각도에서 여성 인력 확대를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강윤철 위원장은 육아기 대학원생을 위한 모유 수유 공간이나 캠퍼스 보육시설이 너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강 위원장은 "대학 차원의 보육 시설은 비용이 비싸서 학생이 이용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고, 대부분은 부모나 가족, 친지 같은 비공식적인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며 "출산과 육아 문제를 혼자서 풀지 않아도 되도록 재정 지원을 늘리고, 보육 시설을 확대하는 등 공식적인 지원 방안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진택 WISET 정책자문위원장(고려대 기계공학과 교수 및 전 고려대 총장)은 "여학생들이 STEM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게 중요하다"며 "과학기술계에서 활약하는 여성 과학자가 많은데 이들의 활동을 조명하고, 여성 과학자들의 기여도를 부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