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과학기술계에서의 성평등을 위한 답은 문화적 뿌리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19일 서울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에서 만난 니스린 엘 하쉐미티(Nisreen El Hashemite) 국제과학신탁기금 왕립과학원(RASIT) 회장은 "한국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여성의 권리와 기회를 확대하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쉐미티 회장은 1958년 몰락한 이라크 왕실의 마지막 남은 공주다. 여성 과학자로서 국제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며 과학계 성평등 증진을 위해 활발히 활동했다. 2012년부터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족이 설립한 비정부 국제기구 RASIT 회장을 맡아 전 세계 여성 과학자들을 지원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날 하쉐미티 회장은 "성평등을 중요시한 가족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여성의 교육과 권리 증진을 위해 노력해 왔다"며 "할아버지인 전 이라크 국왕 파이살 1세는 1922년 이라크 헌법에 성평등을 반영했고, 아버지 파이살 2세 역시 교육을 통해 남녀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를 주는 데 헌신하셨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자란 하쉐미티 회장은 과학, 의학 분야에 진출해 생물의학과 유전체학을 연구해 왔다. 그는 "나는 여성과학기술인의 위상과 성평등 증진을 위해 힘써온 활동가 이전에 의사이자 과학자"라며 "과학과 의학 분야에 진출하면서 학업과 직장에서의 성차별, 특히 여성과 남성 간 급여 격차를 경험하며 성평등을 위해 활동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고 말했다.
하쉐미티 회장은 1998년 여성과학국제연맹을 설립해 전 세계 여성 과학자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특히 2015년에는 2월 11일을 과학 분야 여학생과 여성의 날로 제정하는 데 기여했다. 이로써 과학 분야에서 여성의 업적을 인정하고, 여성들이 직면하는 장벽을 허물기 위한 글로벌 운동을 이끌었다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하쉐미티 회장은 "수십 년간 과학계 성평등을 위해 힘써왔지만, 여전히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약물 연구 관행이 흔할 정도로, 아직 멀었다"며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의 여성 참여 확대를 위해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대해 "굉장히 발전된 나라"라면서도 "과학기술계에서 여성의 참여와 리더십이 확대돼야 한다. 한국 여성들이 더 두각을 나타낼 기회가 많아야 한다"고 했다. 앞서 국제 학술지 네이처(Nature) 인덱스는 지난 8월 한국 특집호에서 "연구 자금과 리더십에서 성별 불평등은 한국이 직면한 심각한 문제"라며 "여성 연구자의 채용과 유지, 승진을 위한 정책은 국가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과제"라고 지적한 바 있다.
다만 하쉐미티 회장은 성평등 문제를 해결할 때 글로벌 단위가 아닌 각 국가 고유의 문화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글로벌 기준을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각국의 문화적 뿌리를 기반으로 한 접근이 필요하다"며 "여성 과학기술인의 권리 증진과 환경 개선을 위해 한국 역시 문화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그는 "성평등을 위한 정책이 단순히 여성 과학자의 숫자를 늘리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며 "과학기술계에 진입한 여성 과학자들이 이탈하지 않도록, 그들의 직업적 성취와 개인적 삶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도 했다.
하쉐미티 회장은 이를 위한 실질적인 방안으로 직장 육아 시설 설치, 유연근무제 도입 확대 등을 제시했다. 그는 "여성이 직업과 가정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사회적 지원이 확대돼야 한다"며 "경력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과학기술계 성평등 달성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하쉐미티 회장은 "여성 과학자들이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고,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성평등"이라고 덧붙였다.
참고 자료
Nature Index South Korea(2024), https://nature.com/collections/south-korea-index-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