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종자 연구와 산업계의 가장 큰 문제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국내에서 개발한 종자에 대한 승인 실적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심지어 승인을 받으려는 시도도 지난 30여년간 단 1건에 불과하다. 수천억원이 넘는 정부 예산을 투자하고도 정작 산업에 도움은 전혀 되지 않았다. 한국만의 독특한 ‘인체 위해성 협의심사’ 제도가 그 원인이다.”
이효연 제주대 생명공학부 교수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식물 개량 전문가다. 그는 이미 2000년 제초제 저항성 잔디 신품종을 개발했다. 제조체를 뿌려도 잡초는 죽고 잔디는 살아남는다. 개발 당시 미국에서도 관심을 보일 정도로 혁신적인 품종으로, 국내 종자 산업의 활력소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미국에 수출돼 미국 전체 잔디 시장의 2%만 확보해도 경제적 가치가 8000억원에 달할 것이라는 보고서도 있었다.
하지만 이 교수의 잔디는 개발이 끝나고 24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주대 캠퍼스를 제외하고 전 세계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이유를 묻자 이 교수는 “한국 정부의 연구비를 지원 받아 개발한 잔디를 해외 기업에 넘길 수 없어 국내 승인을 계속 추진했지만, 끝내 규제의 벽을 넘지 못했다”고 답했다. 정부의 ‘인체위해성 협의심사’의 굴레 안에서 20년 넘게 챗바퀴를 돌다가 결국 승인이 거절됐다.
◇심사에서 해외서 보기 힘든 자료 요구
인체위해성 협의심사 제도는 해외에서 수입되거나 국내에서 개발한 유전자변형생물체(LMO)를 국내에 도입하기 전에 거치는 절차다. 농작물이라면 외부 유전자를 넣어 새로운 특성을 만든 유전자변형작물(GMO)과 자체 유전자를 조절해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는 유전자교정작물(GEO)이 모두 LMO에 포함된다.
협의심사 제도는 ‘유전자변형 생물체의 국가간 이동 등에 관한 법률(LMO법)’에 따라 여러 부처가 모여 LMO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의논하고,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LMO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감을 감안하면 꼭 필요한 제도지만, 문제는 이 과정에서 ‘과학’이 실종됐다는 점이다.
LMO를 수입하거나, 자체 개발해 국내에서 사용하려는 기업은 우선 각 담당 부처에 승인 신청서를 제출한다. 가령 의료용 LMO는 보건복지부, 해양 생물은 해양수산부, 식물 종자는 농림축산식품부가 담당한다. 담당 부처가 검토한 뒤에는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하는 인체위해성 협의심사를 받아야 한다. 인체위해성 협의심사는 담당 부처 산하 기관과 함께 질병관리청, 국립생태원, 국립수산과학원 등 3개 기관이 함께 참여한다.
여러 부처가 심사에 관여하면서 심사나 자료 요구가 중복되는 경우가 많다. 더 나아가 해외 규제 기관에서는 요구하지 않는 자료를 요구할 때도 있다. GMO는 사료용으로도 수입된다. 국립수산과학원은 새우나 수서 곤충이 이 사료용 GMO를 먹었을 때 어떤 영향이 있는지 실험 결과를 제출하도록 했다. 미국이나 유럽연합(EU)은 요구하지 않는 자료다. 국립생태원은 토양 미생물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실험 결과를 제출하라고 하는데, 이 역시 해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자료다.
이 교수도 마찬가지 요구를 들었다. 육지에서 키우는 잔디 신품종이 해양 환경에 무해하다는 걸 입증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할 수 없이 잔디를 직접 갈아서 1년 동안 생선에게 먹여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결국 승인을 받지 못했다.
사실 이 교수가 개발한 유전자변형 잔디는 국내에서 인체위해성 협의심사를 받으려 시도한 유일한 사례다. 유일한 사례가 거절당했으니 당연히 협의심사를 통과한 국내 GMO 종자는 하나도 없다. 국내 기업들은 협의심사를 받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 아예 해외 시장에 바로 진출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라세미아가 개발한 가뭄 저항성 콩이다. 라세미아는 서울대 국제농업기술대학원장과 종자생명과학연구소장을 지낸 김주곤 대표가 2020년 설립한 농업 기업이다. 라세미아는 지난 7월 우루과이와 국제 공동 연구로 가뭄 저항성 콩을 세계 시장에 진출시킨다는 목표를 밝혔다. 김 대표는 “남미와 북미 지역에서 종자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우루과이 진출을 추진했다”며 “한국은 농업 시장 규모 자체가 크지 않아 별도의 국내 승인 절차를 밟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부 연구비로 개발한 품종도 사장돼
김 대표는 협의심사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관련 업계와 학계는 라세미아의 우루과이 진출이 단순히 시장 규모만의 이유가 아니라고 본다. 기약 없는 인체위해성 협의심사에 도전하기보다는 빠른 사업화를 위해 GMO 규제가 강하지 않은 해외 진출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GMO 규제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인 농촌진흥청이 직접 개발한 벼도 승인 과정을 밟다가 중도 포기했다. 농진청은 포도, 블루베리, 크랜베리 같은 베리류의 항산화 기능을 내는 ‘레스베라트롤’ 유전자를 벼에 넣어 혈중 콜레스테롤 농도를 낮추는 기능성 작물을 만들었다. 이 종자는 한때 승인에 가장 가깝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끝내 절차를 마치지는 못했다.
국립농업과학원은 밥 두 공기만 먹으면 하루 비타민A 권장량을 충족하는 ‘황금쌀’을 개발했지만 아예 허가 신청을 하지 않았다. 신청해봤자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비타민A가 부족하면 시력을 잃고 심하면 면역력 약화로 사망에 이른다. 약 없이 밥 먹는 것으로 이런 문제를 막을 수 있는 황금쌀 기술이 아예 사장됐다.
최양도 서울대 교수가 약 10년간 연구한 끝에 개발한 가뭄 저항성 벼도 마찬가지다. 최 교수는 정부의 프론티어 연구개발 사업으로 총 1000억원 규모의 연구비를 지원 받아 가뭄에 강한 ‘트레할로스 벼’를 개발했다. 하지만 이 벼 역시 한국 땅에서는 자라지 못하고 있다. 국내 상용화가 불가능해 인도의 종자 기업에 기술을 이전한 탓이다. 수백억, 수천억원의 정부 연구비가 투입된 결과물이 정작 국내 농가에서는 활용되지 못하고 해외 농민들의 배만 부르게 해준 셈이다.
이 교수는 “정부가 연구자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상업화해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는 것”이라며 “하지만 한국의 종자 연구자들은 뛰어난 기술을 확보하고도 규제의 벽에 막혀 상용화 실적이 전무하다”고 말했다.
◇시민단체 눈치 보다가 연구단 해체
국내 종자 연구자들과 기업들은 인체위해성 협의심사 제도가 기형적으로 운영되는 건 정부가 과학적인 근거를 따지지 않고 일부 시민단체의 눈치를 보며 의도적으로 GMO 승인을 미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국내 바이오 기업의 한 관계자는 “아무리 뛰어난 GMO를 개발하더라도 국내에서는 승인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모두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며 “‘힘 빼지 말고 해외 기업에 판권을 주자’는 경영진의 판단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이유”라고 말했다.
이 교수도 같은 문제를 지적했다. 이 교수는 “협의심사를 거치는 20년 동안 여러 이유로 심사를 지연하는 일이 반복됐다”며 “규제 기관이 GMO 도입을 막으려는 시민단체의 눈치를 보고 있고, 책임자들도 여론을 의식해 자신이 담당을 할 때는 허가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보였다”고 말했다.
정부 차원의 GMO 연구가 시민단체의 요구로 해체된 적도 있다. 농진청은 황금쌀을 개발했던 GM작물사업단을 2017년 해체했는데, 이때 환경단체의 연구 중단 요구가 있었다. GM작물사업단이 해체된 이후 국내 생명공학 작물 연구는 공전하기 시작했고, 상용화를 위한 동력도 약해졌다.
곽상수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식물시스템공학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은 “식량안보는 경제적인 논리를 벗어나 국민의 생존을 위해 정부가 제대로 된 정책을 펴고 일관되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며 “한국은 선진국 답게 과학의 내용을 정치화하지 말고 GMO와 GEO를 포함해 식량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협의심사 제도를 정상화하기 위해 전문성을 높이고, 밀실에서 이뤄지는 비공개 심사 방식을 투명하게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협의심사 제도는 심사가 장기화되면서 전문가 위원이 교체되는 일이 잦다. 새로운 위원이 오면 같은 실험을 다시 요구하는 일도 많다. 여러 부처의 입장을 조정하는 역할도 모호해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라는 점도 문제다. 심지어는 심사가 끝난 후에도 개별 부처가 어떤 의견을 냈는지 듣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반면 해외에서는 규제를 점차 완화하며 GMO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미국은 이미 종자 산업에서 세계 최고 지위를 갖고 있지만, 규제를 완화하며 GMO 산업을 지원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1기 시절이던 2020년 미국은 안전 규칙(Secure Rule)을 개정하고, 이미 GMO로 승인 받은 유전자는 다른 식물에 넣어도 규제를 완화하기로 했다. 가령 토마토에 A유전자를 넣어 만든 새로운 종자가 안전 규제를 통과한 이력이 있다면, 옥수수에 A유전자를 넣은 종자는 간단한 검토만 거친 후 승인한다.
◇세계 경쟁서 뒤져…”국익 챙길 전략적 선택 필요”
유럽은 전문적이고 독립적인 위해성 평가기구인 ‘유럽식품안정청(EFSA)’을 운영하고 있으며, 일본도 ‘식품안전위원회’가 독립적인 안전성평가기구로 심사를 하고 있다. 중국도 협의심사가 아닌 독립적인 위원회가 GMO의 승인 여부를 결정한다. 한국처럼 여러 부처와 기관이 협의를 통해 GMO 승인을 내주는 나라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자국 기술의 상용화율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농업생명공학 응용을 위한 국제서비스(ISAAA)에 따르면 중국이 현재까지 승인한 GMO 77종 중 자국에서 개발한 종자는 16종에 달한다. 전체 GMO 승인 중 20%가 자국 기술로 개발됐다는 의미다. 일본도 GMO 196종을 승인하면서 자국에서 개발한 종자 10종을 포함했다. 반면 한국은 지난해까지 GMO 170종을 승인했고, 국내 기술은 단 한 건도 없다.
한국도 지난 2022년 LMO법을 개정해 협의심사 문제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21대 의원이었던 신영대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권명호 국민의힘 의원이 협의심사를 전문위원회 체계로 바꾸는 내용을 중심으로 각각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하상도 중앙대 식품공학부 교수는 “정부가 작물 개발 관련 정책을 수립할 때는 국가 간 역학 관계나 비용과 편익 등을 따져 최소한의 안전성을 확보하는 범위 내에서 국익을 챙기는 전략적 선택을 해야 한다”며 “뒤처진 것을 반면교사 삼아서 지금이라도 세계적 미래 먹거리 전쟁에 뛰어들어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