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최종현 SK그룹 선대 회장이 만든 비영리 공익법인 ‘한국고등교육재단’이 26일 50주년을 맞았다. 최 선대 회장이 사재 5540만원을 털어서 시작한 재단은 반세기 동안 5128명의 인재를 지원했다. 한국고등교육재단 장학생 출신인 염재호 태재대 총장은 “최 선대 회장은 그 당시 집 한 채 가격을 학생들에게 후원하면서 50년 후 한국이 잘 살게 됐을 때 발생할 사회문제를 풀기 위해 사회과학에 먼저 지원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혜안이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고등교육재단은 이날 서울 광진구 워커힐 호텔에서 미래인재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세상을 바꿀 혁신적인 과학기술을 모색하는 첫 번째 세션에 이어 이날 오후 두 번째 세션은 21세기에 어떤 인재가 필요한 가를 주제로 패널 토론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날 패널 토론에는 한국고등교육재단과 최종현학술원 이사장을 맡고 있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직접 참석해 마이크를 잡고 자신의 인재론을 밝혔다.

한국고등교육재단과 최종현 학술원 이사장인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6일 오후 서울 광진구 워커힐 컨벤션에서 열린 한국고등교육재단 창립 50주년 미래인재 콘퍼런스 인재토크 패널로 참석해 미래 인재상에 대한 의견을 말하고 있다./연합뉴스

최 회장은 “50년 전에 재단을 처음 만들 때 선대 회장의 구상은 집에 돈이 많건 가난하건 상관 없이 무조건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을 뽑아서 해외에 보내서 인재로 키우는 것이었다”며 “그 당시에는 해외여행도 할 수 없었고 다른 나라에서 박사를 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을 뽑는 게 중요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장학생 선발 기준과 인재에 대한 정의가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최 회장은 “예전처럼 대한민국에서 인재를 기를 수 없어서 해외에 위탁교육 보내듯 박사하러 보내야 하는 시대도 아니고, 대학에서 학위를 따야 인재가 되는 것도 아니다”라며 “최근 몇 년 동안 새롭게 시도하는 건 획일적인 것보다 다양성을 중요하게 보고,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을 뽑는 대신 자신이 하고 싶은 가치관이 확실한 사람을 뽑고 있다”고 말했다.

토론에 참석한 국내외 석학들도 21세기 인재론은 달라져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이진형 미국 스탠퍼드대 신경학·생명공학과 교수는 “21세기에 정답이 없다고 느껴지는 건 변화가 너무 빠르기 때문이고,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판단을 빠르게 하려면 명확한 가치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석재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지금껏 인간이 존엄하고 고귀하다고 생각한 이유가 탁월한 지적 능력 때문이었다면, 이제는 AI의 등장으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어디에서 찾을 것이냐는 질문이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며 “자립과 공감의 능력이 중요한 자질이 될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자립과 공감의 능력을 ‘로케이션’과 ‘디자인’이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최 회장은 “어떤 사람이 인재인지 이야기하려면 두 가지가 중요하다. 우선 자신의 현재 위치, 로케이션을 스스로 설정하고 방향성을 가질 수 있어야 문제도 풀 수 있다”며 “자신의 로케이션을 잘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스스로 목표를 가지고 가치관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어 최 회장은 “디자인 능력도 중요한데, 디자인 능력이라는 건 자신에게 주어진 리소스와 문제를 정의하고 적재적소에 분배해서 문제를 풀어나가는 능력”이라며 “10년 뒤, 20년 뒤에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습이 바뀔 텐데, 결국에는 문제를 복합적으로 풀 수 있는 사람이 인재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최 회장은 인재의 정의를 설명하면서 지식과 지혜, 지성의 차이점도 언급했다. 그는 “과거에는 지식이 많은 사람을 인재라고 생각했고, 또 경험이 많은 사람, 지혜가 있는 사람을 인재라고 여기기도 했다”며 “하지만 이제는 집단과 집합으로 모여서 지성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미래에 유지가능한 사회가 되느냐 마느냐는 집단 지성이 사회 내에 존재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최 회장은 평가 방식의 변화도 강조했다. 지금의 사회는 사회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다 보니 사회가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돈에만 매몰된다고 지적했다. 최 회장은 “사회적 가치를 만드는 사람이 돈도 벌고 명예도 있어야 한다”며 “돈만 버는 게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측정 가능한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인사평가 시스템 변화의 필요성도 언급했다. 최 회장은 “그동안 인사자료를 보면 이 사람이 과거에 무엇을 했던 사람인지에 대한 내용만 있다”며 “이제는 앞으로 이 사람이 뭘 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보는 식으로 인사평가 시스템을 바꾸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