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선거일(11월5일)이 1주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과학계의 눈이 미국 대선에 쏠리고 있다. 미 과학계는 일찍부터 민주당 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이 가져올 결과를 두고 저울질에 들어갔다. 사이언스와 네이처 같은 국제 학술지들도 4년 만에 치러지는 미 대선이 향후 미국은 물론 세계 과학에 미칠 영향에 대해 전망을 속속 내놓고 있다.
사이언스에 따르면 이번 대선은 트럼프가 집권했던 2016년 대선과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집권한 2020년 대선 때과 달리 과학 정책이 잘 부각되지는 않고 있다. 양측이 미국 내 낙태와 이민 정책, 중동과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주제에 극단적으로 상반된 견해를 보이는 것과 달리 과학에선 기후변화와 공중 보건 분야를 제외하곤 큰 이견이 잘 보이지 않다는 분석이다.
상당수 과학자들은 그럼에도 이번 선거의 승자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미국 내 연구자와 기업은 물론 세계 과학계에 큰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이 과학 초강대국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세계 과학기술의 인재 풀이 될지, 인공지능(AI)이 인류에 해악이 아닌 혜택이 될 지 이번 대선이 시험무대가 될 것이란 말이다.
◇예산 삭감 우려 적어, 규제 문제 해결에 관심
사이언스는 지난 16일(현지 시각) 미 행정부와 과학계에서 일하는 전현직 전문가 20인에게 새 대통령의 집권 이후 과학계에 미칠 영향을 물었다. 전문가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시절 트럼프 행정부의 무책임한 대응에 대한 논란은 남아있고 두 후보의 스타일과 세계관이 크게 다르지만 전반적인 과학기술 정책에선 크게 다르지 않다고 평가했다.
해리스 후보는 미국 내 기후기술을 촉진하는 반도체과학법(CHIPs Act)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기초 연구 증진을 위한 지출 증가를 기조로 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에 이어 난치병과 고령화를 극복하기 위한 의학 연구 이니셔티브에 대한 의지도 강하다. 트럼프가 집권하면 인공지능(AI)과 우주 등 중국과 경쟁이 붙은 영역에 대한 투자가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일각에선 트럼프가 집권하면 과학 분야의 연방예산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본다. 트럼프는 당장 미국립보건원(NIH)의 내년 예산을 28% 삭감하는 방안을 내놨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실제 예산 지출 규모는 의회에서 결정하기 때문에 대통령의 영향력은 크지 않다고 보고 있다.
트럼프 집권 당시 국립보건원(NIH), 국립과학재단(NSF) 등 연방 연구 기관의 예산 삭감을 시도했지만 트럼프가 소속된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는 최종 법안 심사에서 예산을 늘렸다. 바이든 대통령이 의료혁신기구인 미 보건연구고등계획국(ARPA-H)을 설립하겠다고 막대한 예산을 요구했을 때는 민주당이 삭감한 일이 있다.
다만 미국의 연구 로비스트들은 새 대통령이 선호하는 분야가 집중적으로 증액되면 다른 분야의 감축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프랑스에서 건설 중인 국제핵융합실험로(ITER)나 칠레와 하와이에 건설 중인 대형 천체망원경과 같은 국제 협업 연구 프로젝트들이 주요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행정 규제는 어느 나라나 과학 연구의 발목을 잡는 대표적인 방해물이다. 두 후보는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행정 절차를 간소화하는 방향에 대해서는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일부 과학자는 트럼프 행정부 당시 미국에 적대적인 중국과 교류하고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을 확대하려는 대학에 대해 적대감을 보인 점을 들어 공화당이 집권하면 대학을 규제하는 새 정책을 펼 수도 있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미국은 과학인재의 75%가 이민자 출신일 정도로 개방적인 정책을 폈지만 2017년 트럼프 행정부가 그린카드(영주권) 축소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고용강화를 위한 미국 이민 개혁법’을 내놓으면서 과학기술 인재의 미국 유입에 빨간불이 켜졌다.
해리스 후보는 국경 수호 의지를 밝히면서도 트럼프 행정부가 추방하려는 불법 이민자의 자녀가 미국에 남도록 돕는 노력에 지지 의사를 밝히고 있다. 해리스 후보 어머니인 샤말라 고팔란 해리스 박사도 인도에서 이민을 온 뒤 자메이카 출신과 결혼한 이민자 출신 연구자라는 배경이 있다.
◇대중국, AI 정책에선 차이…인재 육성은 한 목소리
미 대선이 끝나면 미 과학계의 다음 눈길은 백악관 과학정책실(OSTP) 수장에 쏠린다. 미 대통령을 보좌하며 미 과학정책을 총괄하는 OSTP 실장은 ‘대통령의 과학자’로 불릴 정도로 영향력이 크다. 누가 되느냐에 따라 대통령의 과학에 대한 태도를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
과학기술 컨트롤타워인 OSTP 운영에 대한 해리스와 트럼프의 태도는 대체적으로 신뢰를 받고 있다. 해리스 후보는 전통적인 민주당 후보 답게 OSTP를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 후보도 대통령 당시 과학자들의 존경을 받는 기후학자인 켈빈 드로게마이어 박사를 OSTP 실장에 앉히면서 과학계의 우려를 불식했다.
미국은 트럼프 집권 이후 과학기술 분야에서 강경한 대(對)중국 정책을 펴고 있다. 트럼프 후보는 미국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두 나라 협력의 가치를 입증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협력의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 다만 해리스 후보는 군사 외교적 긴장관계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상호 교류를 이어 나가는 타협점을 찾고 있다. 민감한 기술은 보호하되 중국과 관계를 끝내지 않는다는 방향이다.
해리스와 트럼프 후보는 차세대 교육 강화에선 기본적으로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과학계는 누가 이기든 2022년에 출범한 민간 부문 이니셔티브인 STEMM(과학기술공학수학의학)이라는 확장된 인재 양성에 집중할 것으로 보고 있다.
AI의 발전속도를 인위적으로 늦출 것인지 더 속도를 낼 것인지 문제도 이번 미 대선의 관심거리다. 해리스 후보는 부통령으로 일하며 AI 확대에 깊이 관여했다. 해리스 후보가 대선에 이기면 AI의 안전하고 윤리적인 사용을 보장하기 위해 고안된 ‘가드레일’을 강력히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일부 과학자들은 트럼프가 개인정보를 희생하면서 AI를 강화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트럼프는 바이든 행정부가 수립한 안전한 AI 활용을 위한 행정명령이 급진적 좌익사상을 강요한다며 폐지를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업계는 버락 오바마부터 트럼프, 바이든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미 대통령의 주요 AI 정책은 많은 영역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보고 있다.
◇네이처지 “트럼프 집권은 과학계 불안 증폭”
영국에서 발간하는 네이처지는 이번 대선이 개방과 협력 정신으로 75년간 성장한 미국의 과학기술의 패권을 지키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네이처는 지난 28일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지해 온 과학적 우위에 도전을 받고 있다”며 “이번 미 대선에서 승리하는 후보와 새로운 연방 상하원 의원 모두 미국 과학이 계속 번창하도록 보장하는 것이 숙제로 남아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트럼프의 강경한 연설과 발언에 주목하며 미국의 과학이 트럼프를 견제하는 데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지 주목했다. 기후 기업을 육성하는 인플레이선감축법(IRA)만 해도 트럼프가 집권하면 당장은 뒤집지 못하겠지만 장기적으론 폐지될 것으로 예측했다.
한국도 미 대선 결과가 미치는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은 지난 17일 ‘미국 대선후보 과학기술혁신 분야 공약 비교 및 시사점’이란 보고서에서 해리스 후보가 당선되면 국내 전기차와 배터리 산업의 경쟁력을 더욱 강화할 기회가 될 수 있지만, 글로벌 공급망 규제에 당장 대응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후보가 재집권에 성공하면 인플레이션 감축법 혜택 축소, 중국 견제 강화에 따른 투자전략 조정과 배터리 원료・소재 정책에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참고 자료
Science(2024), DOI: https://doi.org/10.1126/science.zbbyifs
Nature(2024), DOI: https://doi.org/10.1038/d41586-024-03417-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