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KTX 열차 객실에 정부가 제작한 '후쿠시마 오염수 10가지 괴담' 책자가 비치돼 있다./뉴스1

2016년 주한미군이 경북 성주에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배치를 결정한 이후 특산물인 성주 참외는 온갖 괴담에 시달렸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성주에서 열린 사드 반대 집회에 참석해 “전자파 밑에서 내 몸이 튀겨질 것 같다”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작년 6월 마무리된 성주 사드 기지 환경영향평가 결과 사드의 전자파는 인체 보호 기준의 0.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휴대폰 기지국보다도 안전한 수준이었다. 괴담에서 풀려난 성주 참외는 불티나게 팔렸다. 지난해 경북 성주 참외 매출액은 6000억원을 넘어섰다. 1970년 성주군이 참외 시설 재배를 시작한 이후 역대 최고 매출이었다.

제2의 사드 전자파 괴담을 막기 위해 과학자들이 힘을 모은다. 한국과학창의재단은 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사이언스미디어센터 설립 방안을 공개했다. 조율래 한국과학창의재단 이사장은 “언론에 과학 이슈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며 “독립적인 기관을 만들어서 3년 동안 운영하면서 재정적인 자립을 돕고, 언론과 과학자 간 신뢰관계를 구축해 나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객관적 근거에 기반한 과학기술 정보, 대중에 전달해야

사이언스미디어센터는 과학적인 근거를 가진 정보를 미디어에 제공하는 기관이다. 과학기술이 연관된 사회 이슈가 발생했을 때, 과학자의 견해와 증거 기반의 가치중립적인 정보를 미디어에 제공하는 게 목표다. 2002년 영국에서 유전자 변형 농산물(GMO)의 유해성을 두고 사회적 갈등이 커졌을 때 언론에 과학계의 중론을 제공하려고 처음 생겼다. 이후 호주, 뉴질랜드, 독일, 대만, 케냐, 스페인에 사이언스미디어센터가 생겼다.

사이언스미디어센터는 사회 이슈와 관련된 과학기술 연구자의 견해를 취합해 미디어에 배포하고, 분야별 전문가의 풀을 만들어서 취재와 인터뷰가 필요한 미디어에 제공하는 역할도 맡는다. 당장의 이슈가 아니더라도 중요한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미디어 브리핑을 운영하고, 주요 저널의 논문과 연구 동향을 정리해서 배포하는 기능도 한다.

영국은 2002년 사이언스미디어센터를 설립하고 과학 이슈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를 실시간으로 미디어에 제공해 잘못된 정보가 확산되는 것을 막고 있다./sciencemediacentreuk

이정순 한국과학창의재단 과학문화협력팀장은 “사이언스미디어센터는 일반 시민과 정책입안자가 과학기술 이슈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증거 기반의 가치중립적인 정보를 미디어에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며 “과학기술계와 언론계의 가교 역할을 한다고 이해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영국 사이언스미디어센터는 2000여명의 과학자 풀을 보유하고 있다. 왕립학회에 소속된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풀을 구성해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전문가들의 견해를 취합해 미디어에 전달하고 있다. 이 팀장은 “이슈가 있을 때는 즉각적으로 대응하고, 이슈가 없을 때도 과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문제를 발굴해서 한 주에 2회 정도 뉴스레터 형식으로 과학자들의 견해를 미디어에 제공한다”고 말했다.

사이언스미디어센터는 언론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괴담이 퍼지면서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피해까지 초래하기 때문이다. 2008년 광우병 사태 당시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뇌에 구멍이 난다는 괴담이 확산했지만 전혀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이야기였다. 한국경제연구원은 광우병 사태로 인한 국가적 손실이 최소 3조7513억원이라고 분석을 하기도 했다. 지난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논란도 과거 한국 사회를 괴롭힌 대표적인 비(非)과학 괴담이다.

국내에서도 괴담을 막기 위해 과학기술계의 목소리를 모으는 창구가 필요하다는 지적은 꾸준히 나왔다. 2022년 한국과학기자협회는 4월 과학의 달을 맞아 ‘한국형 사이언스 미디어센터 설립’을 주제로 이슈 토론회를 열고 “과학자와 대중의 언론에 대한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민관 중간 형태의 ‘K-사이언스 미디어센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국과학창의재단은 과학기술 분야 종사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해 정확한 정보 제공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확인했다. 응답자의 83%가 ‘사이언스미디어센터가 설립되면 미디어에 자문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방법을 몰라서 안 했을 뿐 적극적으로 미디어에 소통할 의지는 있는 것이다.

◇정치적 중립성이 관건…창의재단 역할에 물음표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사이언스미디어센터 설립을 위해 내년도 예산안에 3억원을 배정했다. 기획재정부와 국회 심의를 통과하면 이 예산으로 내년에 사이언스미디어센터를 출범할 계획이다. 출범 초기 3년 정도는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센터의 운영을 돕는다. 재정적 독립을 위한 일종의 인큐베이팅(보육) 기간이라는 게 재단의 설명이다.

이 팀장은 “사이언스미디어센터를 설립했다가 문을 닫은 일본의 경우 정부의 지원이 끊기는 시점에 기부처를 확보하지 못해 센터가 문을 닫았다”고 설명했다. 출범 후 3~4년이 지나서 센터가 자리를 잡으면 그때는 기업이나 비영리기관 등 다양한 기부처를 확보해 재정적으로 자립하고, 이 때부터는 정부와 재단도 센터 운영에서 손을 뗀다고 조 이사장은 설명했다.

국가별 사이언스미디어센터 운영 현황./창의재단

하지만 센터 출범 과정에서 정부 예산이 투입되고 창의재단이 인큐베이팅 역할을 맡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는 “사이언스미디어센터가 어떤 형태로든 우리 사회에 필요한 건 맞지만, 정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건 여러 의미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정부가 사이언스미디어센터를 지원하면 예산이 투입된 연구개발(R&D) 성과나 과학기술 정책을 홍보하는 쪽으로 기울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이 명예교수는 “사이언스미디어센터가 성공하려면 많은 과학자가 자율적으로 사업에 참여해야 한다”며 “정부의 영향력 아래 센터가 있으면 과학자들의 공감을 얻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과학창의재단이 그동안 과학기술 홍보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비판적 목소리를 반영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덕환 명예교수도 창의재단이 사업을 주도하는 것에 대해 “그동안 창의재단과 과학기술계의 관계와 소통이 활발하지도, 원만했다고 볼 수도 없다”며 “조 이사장의 임기가 끝난 상황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게 맞는지도 의문”이라고 말했다.

조 이사장은 지난 1월 임기가 끝났지만 후임 이사장이 선임되지 않아 계속 업무를 보고 있다. 과기정통부는 조만간 조 이사장 후임을 뽑기 위한 임원추천위원회를 꾸릴 예정이다. 조 이사장은 “임기와 무관하게 사이언스미디어센터 설립을 마지막 소명이라 생각하고 추진하겠다”며 “센터의 독립성과 중립성도 보장하겠다”고 말했다.

조 이사장은 “뉴질랜드 사이언스미디어센터는 예산 100%를 국고에서 지원받지만, 지원은 하되 간섭을 하지 않는 문화로 독립성을 보장받는다”며 “재정적인 자립을 위한 기반을 닦으면 3~4년 후에는 반드시 정부와 재단에서 재정적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