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韓美) 공동 연구진이 전 세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꿈의 비만약’들이 어떻게 체중을 줄이는지 세계 최초로 밝혀냈다. 그동안 비만 치료제가 식욕을 줄이고 포만감을 제공해 체중 감량 효과가 나온다고 알려졌지만, 구체적인 작용 원리가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으로 비만 치료제의 효능을 업그레이드하고 다른 질병 치료까지 용도를 확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최형진 서울대 의대 교수와 케빈 윌리엄스 미국 텍사스대 사우스웨스턴메디컬센터 교수 공동 연구진은 “최근 비만 치료제로 쓰이는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GLP)-1′ 유사체가 뇌에서 시상하부 가운데와 등쪽에 있는 신경세포를 통해 포만감을 높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27일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 28일 자에 실렸다.
◇뇌 신경회로에 작용, 포만감 유발
GLP-1은 음식을 먹으면 위·소장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식사 후 포만감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난 2005년 GLP-1을 모방한 성분의 당뇨병 치료제가 처음 출시됐으나 환자의 체중이 줄어드는 좋은 부작용이 확인되면서 비만 치료제로 방향을 틀었다. 마치 비아그라가 심장병 약으로 개발됐다가 환자에게 뜻밖의 부작용이 나타나 발기부전치료제가 된 것과 같다.
덴마크 제약사인 노보 노디스크는 GLP-1 유사체인 세마글루타이드로 당뇨병 치료제 오젬픽과 비만 치료제 위고비를 잇따라 개발했다. 미국 제약사 일라이 릴리 역시 같은 계열 물질인 티르제파타이드로 마운자로(당뇨병 치료제)와 젭바운드(비만 치료제)를 출시했다.
주 1회 투약으로 위고비는 최대 15%, 젭바운드는 최대 25.3% 체중을 줄인다. 현재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현재 없어서 못 파는 약이 됐다. 비만 대국인 미국에서 비만 치료제 덕분에 스몰 사이즈 옷이 다시 인기를 얻을 정도가 됐다. 하지만 GLP-1 유사체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식욕을 억제하는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식이를 조절하는 뇌의 시상하부를 조절해 비만 치료 효과를 보이는 것으로 추정했다. 시상하부는 입천장 바로 위쪽에 있는 뇌 영역으로, 대사과정과 자율신경계를 조절한다. 체온이나 생체리듬도 시상하부가 관장한다. 연구진은 인간과 쥐의 뇌 조직을 분석했다. GLP-1 유사체와 결합하는 수용체는 시상하부의 가운데와 등쪽 신경회로에 가장 많이 있었다.
다음은 쥐의 해당 신경회로에 특정 단백질을 집어넣어 빛을 비추면 작동하도록 했다. 바로 광유전학 기법이다. 신경회로에 빛을 비추자 쥐가 전보다 먹이를 덜 찾았다. 포만감이 발생한 것이다. 반대로 해당 신경회로를 억제하자 식사 시간이 길어졌다. 식탐이 생긴 것이다. 연구진은 인공지능(AI)을 이용해 음식을 보는 것만으로도 포만감을 일으키는 신경세포 집단까지 찾아냈다.
최형진 교수는 “과학적 작용 원리를 잘 모르던 약이 이제는 과학이 됐다”며 “기존 비만치료제는 메스꺼움이나 구토 부작용이 있는데, 이를 줄이고 포만감만 조절하는 새로운 비만 치료제를 개발할 시작점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공교롭게도 비아그라도 한국 과학자들이 약품 출시 후에 작용 원리를 밝혀냈다. 국내 바이오기업인 크리스탈지노믹스 연구진은 포항방사광가속기에서 비아그라가 작용하는 인체 단백질의 입체 구조를 밝혀 2003년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표지논문으로 발표했다.
◇전 세계 제약시장 흔든 비만 치료제
이번에 체중 감량 원리가 밝혀진 위고비와 젭바운드는 현재 없어서 못 파는 약일 만큼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다. 노보 노디스크와 일라이 릴리는 GLP-1 계열 치료제 덕분에 매출이 급성장했다. 지난해 노보 노디스크의 매출은 전년 대비 31%, 릴리는 20% 올랐다. 글로벌 20대 대형 제약사 가운데 두 자릿수 매출 증가율을 기록한 곳은 두 곳뿐이다.
위고비와 젭바운드는 이제 현대판 만병통치약으로 불린다. 비만이 유발하는 지방간, 심장병. 치매, 수면무호흡증에도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잇따라 확인됐다.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었더라도 비만 치료제 때문에 임신이 된다는 주장도 나왔다.
위고비와 젭바운드가 비만을 넘어 다양한 질병 치료제로 발전할 가능성이 커지자 두 회사는 수조 원을 들여 생산시설 확충 경쟁을 벌이고 있다. 글로벌 제약산업 분석업체인 이벨류에이트파마(EvaluatePharma)에 따르면 GLP-1 유사체 기반 비만 치료제 시장은 연평균 30% 성장할 전망이다. 2030년에는 100조원 규모로 성장하며, 당뇨치료제까지 포함하면 2028년 100조원 규모를 넘어선다.
이번 연구를 주도한 최형진 교수는 국내 대표적인 의사과학자다. 그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내과학 석사와 분자유전체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병원과 충북대병원에서 내분비내과 교수로 환자를 진료하다가 2015년 서울대 의대 해부학교실 교수로 오면서 임상의사에서 의사과학자로 진로를 바꿨다.
최 교수는 “3년 당뇨 환자를 보다가 음식 중독 연구에 매진해서 근본 원인을 찾는 게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올 3월 서울대 자연대 뇌인지과학과 교수(의대 겸무)로도 임용됐다. 그동안 비만 치료가 가능한 디지털 인지행동 치료제를 개발했으며, 생쥐와 원숭이를 통해 뇌에서 음식 중독이 일어나는 원리를 규명하고 있다. 최 교수는 원숭이도 뇌 시상하부에 있는 억제성 신경을 활성화하면 좋아하는 음식을 갈구하는 행동이 늘어나는 것을 확인했다. 이 결과는 지난 4월 국제 학술지 ‘뉴런’에 실렸다.
참고 자료
Science(2024),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dj2537
Neuron(2024), DOI : https://doi.org/10.1016/j.neuron.2024.03.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