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선천성 망막질환(IRD)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와 그 부모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희소 난치성 레베르선천성흑암시(LCA) 환자를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치료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이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원하는 유전자를 자르고 붙일 수 있는 효소 복합체이다. 미국 오리건 보건과학대 연구진이 LCA 환자 14명의 망막에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주입하는 임상시험에서 시력 일부를 회복시켰다고 발표했다.
선천성 안질환 환자에게 유전자 치료제가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돌연변이 유전자를 정상으로 되돌려 치료하는 방식이다. 국내에서도 유전자 치료제를 이용해 선천성 안질환 정복에 뛰어든 연구자들이 있다. 김정훈 서울대 의대 교수는 국내외 연구자를 모아 선천성 안질환 치료를 위한 ‘IRD 팀’을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다. 여러 IRD 질환 중에서도 망막층간분리가 첫 번째 공략 대상이다. 김 교수는 “동물실험에서 치료에 필요한 수준보다 4배나 되는 효과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3세대 유전자 가위로 변이 유전자 교정
생명체의 설계도인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선천성 질환이 발생한다. 그런 질환은 7만5000개가 넘는다. 과학자들은 유전자에 생긴 돌연변이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식으로 질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고 있다. 3세대 유전자 가위인 ‘크리스퍼 캐스9(CRISPR-Cas9)’이 등장하면서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유전자 치료제도 가시권에 들었다.
크리스퍼 캐스9 유전자 가위는 박테리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박테리아는 자신에게 침입한 바이러스의 유전자 일부를 표지로 갖고 있다가 나중에 같은 유전자를 가진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바로 효소 단백질로 토막 낸다. 유전자 가위는 특정 DNA를 찾아가 지퍼처럼 결합하는 유전물질인 가이드 RNA와, 결합 부위를 잘라내는 효소 단백질인 캐스9으로 구성된다.세계 최초로 출시된 유전자 치료제인 카스게비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헤모글로빈 생성을 막는 ‘BCL11A’ 유전자를 없애 겸상적혈구증후군을 치료한다.
미국 오리건 보건과학대 연구진이 치료한 LCA는 10만명 중 2~3명에게만 나타나는 희소 질환으로, 아직까지 치료제가 없었다. 망막 기능과 발달에 관여하는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긴 것이 원인으로 알려졌다. 연구진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변이 유전자를 교정했다. 그 결과 14명 중 11명이 시력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마크 펜네시 오리건 보건과학대 의대 안과 교수는 “치료를 받은 참가자들은 잘못 놓인 휴대전화를 찾거나, 작은 불빛을 보고 커피 머신이 작동하는지 알 수 있었다”며 “건강한 사람에게는 사소한 일상일 수 있으나 시각을 잃었던 사람들은 삶의 질이 크게 향상된다”고 말했다.
국내 연구는 동물실험까지 마친 상태다. 김정훈 교수는 “인간과 같은 질환을 유발한 생쥐를 개발해 실험을 진행했고, 세포에서 변이 유전자 교정 효율이 40% 수준까지 나왔다”고 말했다. 치료가 절반도 안 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상은 다르다. 김 교수는 “100개의 세포가 있으면 40개가 교정된다는 의미인데, 망막질환의 경우 황반부에만 작용하면 되기 때문에 교정 효율이 7~10% 정도면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동물 세포 수준에서 교정 효율이 높아도 실제 사람에게 적용하면 효율이 떨어진다. 하지만 김 교수가 개발한 치료제는 이미 동물 세포에서 필요한 수준의 4배까지 치료 효율을 기록했기 때문에 사람에게 적용해도 문제가 없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최근에는 유인원 실험을 통해서도 치료제의 효능을 확인했다고 김 교수는 덧붙였다.
◇치료제 시험할 맞춤형 미니 장기도 개발
망막층간분리 유전자 치료제는 김 교수 혼자의 힘으로 만든 게 아니다. 서울대 의대에서만 조동현, 송현범, 강병철, 배상수 교수가 참여하고 있다. 배상수 교수는 초정밀 아데닌 염기교정 유전자가위 ‘ABE8eWQ’를 개발했다. 기존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가 유전자를 교정한다면, 이 기술은 유전자를 이루는 염기 일부를 넣거나 뺄 수 있다.
서울대병원에서도 박찬욱 교수와 김기범 교수, 이기황 교수가 참여했고, 연세대 의대의 김형범 교수와 지헌영 교수, 울산대 의대의 성영훈 교수도 공동 연구진이다. 김형범 교수는 지난해 4월 국제 학술지 ‘셀’에 차세대 유전자 가위 기술인 프라임 편집기를 정밀하고 안전하게 설계할 수 있는 인공지능(AI) 모델을 개발하기도 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프라임 편집기는 DNA 이중가닥을 완전히 자르지 않고 한 가닥만 자르는 기술로 기존 유전자 가위보다 안전성을 높였다. 대신 그만큼 복잡하고 경우의 수도 다양하기 때문에 유전자 가위를 안전하게 설계하는 게 중요하다. 김형범 교수는 AI를 이용해 프라임 편집기의 성능과 안전성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정부연구기관들도 참여했다. 구본경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교정연구단장과 이태걸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안홍찬 차의과학대학 교수,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연구진도 IRD 팀에 참여하고 있다. IBS와 생명연은 치료제 개발에 필요한 환자 맞춤형 오가노이드(미니 장기)를 만드는 작업을 맡았다. 구 단장은 “IRD는 희소질환이다 보니 제약사들은 관심이 없고, 대학과 연구기관이 대신해서 나선 것”이라며 “환자 맞춤형 오가노이드를 만들어서 거기에 유전자 가위를 집어넣어서 치료제의 효능을 시험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김정훈 교수는 망막층간분리를 치료할 수 있는 유전자 치료제 기술이 인체 대상 임상시험 직전까지 도달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국내 망막층간분리 환자가 모두 88명인데 이 가운데 돌연변이 22개를 확인했다”며 “바꿔서 말하면 돌연변이 22개만 잡으면 우리나라에서 망막층간분리로 실명하는 사람이 없어진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상용화 속도 높이려면 범부처 연구센터 필요”
국내 연구진은 아직 환자 대상 임상시험은 하지 못하고 있다. 임상시험을 하려면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임상시험계획서(IND)를 받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실제 환자에게 유전자 가위를 전달할 아데노연관 바이러스(AAV)로 다시 동물실험을 해야 한다.
인체용 AAV를 만드는 비용은 30억원에 달한다. 해외에서는 동물실험 결과만 있으면 임상시험을 할 수 있거나 자금력이 풍부한 다국적 제약사가 참여해 비용 문제도 해결할 수 있지만, 국내는 그렇지 못하다. 김정훈 교수는 “해외에서 연구를 했다면 이미 임상시험을 시작했을 텐데, 3, 4년 전에 기술을 개발하고도 멈춰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IRD 팀 연구자들은 다른 지원 없이 각자 연구비로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자들은 상용화 속도를 높이려면 범부처 차원의 유전자치료센터가 필요하다고 했다. 유전자 치료제 관련 법과 제도를 개정하면 정부가 AAV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을 대거나 임상시험 절차를 간소화할 수 있다고도 제안했다.
참고 자료
NEJM(2024), DOI: https://doi.org/10.1056/NEJMoa2309915
Methods in Molecular Biology(2023), DOI : https://link.springer.com/protocol/10.1007/978-1-0716-2879-9_14
Progress in Retinal and Eye Research(2023), DOI : https://doi.org/10.1016/j.preteyeres.2022.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