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에서 상영되며 세계적 인기를 끈 SF시리즈 ‘삼체’는 중국 작가 류츠신의 소설이 원작이다. 소설과 넷플릭스 시리즈 모두 외계 행성의 삼체인과 지구인 사이의 갈등을 다룬다. 삼체인은 지구를 침략하기 위해 400광년이라는 먼 거리를 이동하는데, 그동안 지구의 과학기술이 발전해 자신들을 앞지를 것을 우려한다.

고민 끝에 삼체인이 내놓은 해법은 지자라는 양성자를 지구에 먼저 보내서 지구의 과학기술 연구를 훼방놓는 것이다. 삼체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지구의 과학기술 연구시설은 바로 입자가속기였다. 지자의 방해로 전 세계 입자가속기가 엉뚱한 결과를 내놓기 시작하면서 물리학의 지식 체계는 붕괴하고 지구의 과학자들은 절망에 휩싸인다.

‘삼체’는 SF소설이지만 외계 문명이 지구를 공격하기 위해 입자가속기부터 망가뜨린다는 설정은 과학기술계에서 입자가속기가 가지는 위상을 보여준다. 입자가속기는 물리학의 미해결 난제를 해결하며 수많은 노벨상 연구를 탄생시킨 거대 실험장치다. 어떤 입자가속기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기초과학 연구 수준이 결정될 정도다.

영국 물리학자 힉스 박사가 자신이 예측한 힉스 입자를 검출한 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강입자가속기를 둘러보고 있다. 힉스 박사는 지난 4월 8일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CERN

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입자가속기는 스위스와 프랑스의 국경에 걸쳐 있는 강입자가속기(LHC)다. 둘레만 27㎞에 이르는 이 장치는 모든 입자에 질량을 부여해 ‘신의 입자’로 불리는 힉스 입자의 존재를 입증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계 최대 입자 물리학 연구소인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는 1994년부터 2008년까지 14년에 걸쳐 LHC를 건설했다. 지하 100m 깊이에 둘레 27㎞의 입자가속기를 설치해 137억년 전 빅뱅 직후를 재현하고, 힉스 입자의 존재를 찾는 게 목표였다. 건설 비용만 13조원이 들었고, 전 세계에서 6000여명의 과학자가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CERN은 실험을 시작한 지 4년 만인 2012년 7월에 마침내 힉스 입자를 찾아냈다.

우주 탄생의 비밀을 푼 CERN에 한국이 회원국 가입을 검토하고 있다. 세계 최대 입자가속기를 비롯해 다양한 연구장비와 시설, 인프라를 폭넓게 이용할 길이 열리는 것이다.

30일 과학기술계에 따르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5월 중에 CERN 준회원국 가입 타당성을 따져보는 연구용역을 낼 예정이다. 올해 말쯤 연구용역 결과가 나오면 이를 바탕으로 CERN과 준회원국 가입을 위한 본격적인 협상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CERN 준회원국 가입에 대한 현장 연구자들의 요구는 꾸준했다”며 “준회원국 가입에 대한 장단점을 따져보고 어떤 이점이 있는 지 살펴보기 위한 차원”이라고 말했다.

CERN은 23개 정회원국과 8개 준회원국으로 이뤄져 있다. 정회원국은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고, 준회원국에는 비유럽 국가인 브라질, 인도, 파키스탄 같은 국가들이 들어가 있다. 일본과 미국, 러시아 등은 CERN과 대등한 협력 관계를 갖는 옵서버국이다. 회원국은 국내총생산(GDP) 비율로 분담금을 내는데 준회원국은 회원국의 10분의 1 수준이다. CERN의 연구 방향과 프로젝트를 결정하는 이사회와 과학정책위원회는 준회원국 이상의 국가들만 참여가 가능하다.

한국은 2007년 CERN과 국제협력사업을 맺고 공식적으로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17년째 협력 관계를 이어가고 있지만, 비회원국이라 여러 걸림돌이 많다는 게 현장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CERN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 김태정 한양대 물리학과 교수는 “CERN의 연구에 참여하는 한국 연구자가 160여명에 달하는데 142명이 등록한 인도나 137명이 등록한 브라질 같은 준회원국보다 많은 규모”라며 “정작 CERN의 주요 프로그램 선발이나 시설 구축과 장비 제작, 박사급 연구자의 스태프 채용 등은 준회원국 이상에만 열려 있어 한국 연구자들은 참여가 제한돼 있다”고 말했다.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컨트롤 센터 모습./로이터

과학기술계에서는 한국이 CERN 준회원국이 되면 핵심 연구에 참여할 기회가 더 늘어나고, CERN이 주도하는 각종 대형 건설 사업에 한국 기업이 참여할 수 있는 길도 열릴 것으로 본다. CERN의 가속기와 실험장비를 보다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되고, CERN의 국제공동연구 프로젝트에 한국 과학계의 목소리를 더 적극적으로 개진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물리학계에 따르면 한국의 고에너지 연구자 수는 LHC 연구사업에 참여하기 전과 후를 비교하면 2배 가까이 늘었다. 그만큼 미국과 유럽연합, 일본 등이 주도하는 고에너지 물리학에서 한국의 입지를 더 다질 수 있다는 평가다.

회원국 가입 추진은 국내 산업계에도 희소식이다. CERN은 LHC의 후계자 격인 차세대 원형 입자 가속기(FCC)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FCC 건설은 예산만 40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거대 사업이다. CERN 회원국이 되면 분담금에 따라 입찰 지분이 정해지는데 0.5%의 입찰 지분만 가지더라도 국내 기업이 수주할 수 있는 금액은 2000억원에 달한다. 초전도, 전력, 냉각, 특수 설비, 실리콘 반도체 분야의 기업들이 CERN을 통해 유럽 시장에 진출할 수 있을 전망이다.

고려제강 계열사인 ‘KAT’의 경우 한국과 미국, 유럽연합 등 주요국이 프랑스 남부에 짓는 국제핵융합실험로(ITER)에 초전도선재를 공급할 정도로 뛰어난 기술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CERN과의 계약을 통해 FCC에 사용할 초전도선재 개발 1단계 사업에 참여했지만, 한국이 회원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2단계 사업에는 참여가 보류된 상태다. 준회원국 가입만 해도 이런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셈이다.

유일한 걸림돌은 연간 120억원에 달하는 분담금이다. CERN 준회원국 분담금은 한 번 가입이 결정되면 매년 지출해야 하는 돈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게 과기정통부의 설명이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국제기구 분담금은 국가 채무의 성격인데다 한 번 가입하면 우리 마음대로 나올 수도 없기 때문에 처음 가입을 결정할 때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CERN의 연구 시설을 이용하면서 한국 과학자들과 젊은 연구자들에게 돌아가는 기회와 차기 FCC 건설 과정에서 생기는 국내 기업들의 수주 가능성을 따지면 연 120억원은 큰 돈이 아니라는 목소리가 더 힘을 얻는다.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국제 R&D 협력 사업 가운데 대부분은 실체가 불분명하지만 연구 실적 면에서 10년 넘게 성과를 내온 연구기관이라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김태정 교수는 “CERN이 세계적인 연구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데, 우리가 준회원국 자격이 아닌 비회원국 자격을 계속 유지하는 건 새로운 기능과 가능성을 무시한 채 용량과 성능이 제한된 휴대전화를 계속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CERN 준회원국 가입은 국가 성장 동력인 기초과학의 입지를 강화하고, 국내 연구자의 과학적인 역량을 세계 무대에서 펼칠 수 있는 지위를 확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