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정원 증원을 둘러싼 의·정 갈등이 좀처럼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의료공백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심각하고, 의·정 갈등이 블랙홀처럼 다른 이슈까지 모두 집어삼키고 있다. 의·정 갈등의 보이지 않는 희생자 중 하나가 ‘의사과학자’다.
불과 올해 초까지만 해도 과학계는 의사과학자 양성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에서 의사과학자 양성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발언이 잇따라 나왔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비롯해 여러 과학기술원이 의학전문대학원 설립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고, 서울대도 의과학과 학부 신설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의대 증원이 본격 추진되면서 의사과학자 양성 논의는 수면 아래로 숨어 버렸다. 지난 3월 20일 정부가 발표한 의대 정원 증원 계획에서 서울대 의과학과 정원 50명은 단 한명도 반영되지 않았다. 과학기술원들도 의전원 설립 논의에 대해 입을 닫았다. 의사과학자 양성 주무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금은 의사과학자 언급을 할 때가 아니다”라며 침묵하고 있다.
한국이 가만히 있다고 경쟁 국가들이 기다려주는 건 아니다. 의사과학자는 첨단 바이오 산업의 핵심 인력이다. 글로벌 상위 10대 제약사의 최고기술책임자(CTO)의 70%가 의사과학자 출신이다. 코로나19 백신의 조기 개발을 이끈 모더나를 만든 로버트 랭거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대표적인 의사과학자의 성공 사례다. 윤석열 정부도 첨단 바이오를 국가전략기술로 선정하고 지원을 늘리고 있지만, 연구를 담당할 ‘사람’이 없는데 성과를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조선비즈는 의대 증원 이슈에 증발해 버린 의사과학자 양성 논의를 되살리기 위해 이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대한민국1호 의과학자인 유욱준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과 한국형 아르파에이치(ARPA-H·보건의료고등연구계획국)를 책임질 선경 추진단장이 좌담회에 참석했다. 선 단장은 흉부외과 전문의이자, 한국형 인공심장 실용화 개발을 주도한 의사과학자다.
임상의사로서 세계적인 연구 성과를 내놓은 의사과학자들도 참여했다. 이명식 순천향대학교 의생명연구원 석좌교수는 대사질환의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연세 의사과학자 양성사업단장을 맡고 있는 이민구 연세대 의과대학 교수도 세포막 단백질과 관련한 세계적 연구자이다. 좌담회는 24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서 이영완 조선비즈 과학에디터의 사회로 진행됐다.
◇”미국이 한 해에 1100명 배출, 한국은 35명”
이영완 에디터(이하 이영완) : “의사과학자가 왜 필요한 지에 대해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이민구 연세대 의대 교수(이하 이민구) : “의사과학자가 필요한 이유는 한둘이 아니다. 우선 난치 질환에서 기존에 없었던 치료법을 발견하고, 약이나 기술을 발견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사람들이 의사과학자다. 의사과학자는 임상과 기초과학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에 대해 전체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보건의료산업에서 가장 많은 부를 창출할 수 있는 분야가 신의학과 기술개발인데 이 역할을 해줄 사람이 바로 의사과학자다.”
선경 한국형 아르파에이치 추진단장(이하 선경) : “예를 들어 코로나19와 비슷한 팬데믹이 다시 터진다고 생각해보자. 코로나19 때 몇 년이 지났는데도 우리는 백신이나 치료제를 만들지 못했다. 다음 팬데믹 때는 2~3개월 안에 백신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걸 의사들이 혼자 할 수는 없다. 의사과학자가 필요한 이유다. 의료라는 건 융합 학문이고 응용 학문이기 때문에 과학기술만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임상의사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이 둘 사이에 통역을 해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명식 순천향대학교 의생명연구원 석좌교수(이하 이명식) : “국민의 건강과 질병 치료에 관한 문제를 정확하게 풀어내려면 의사가 없어서는 안 된다. 국민 건강이나 질병의 시작점이자 마지막에 늘 의사가 참여해야 한다. 이걸 더 잘 하기 위해서 의사과학자가 당연히 필요하다.”
이영완 : “정부에서는 현재 의과대학 졸업생의 1.6% 수준인 의사과학자를 3%까지 늘린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어떻게 보나.”
유욱준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이하 유욱준) : “전체 의사의 10% 정도는 연구에 전념하는 의사과학자가 돼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국가 전체의 역량을 높일 수 있다고 본다.”
이민구 : “미국의 경우 올해 의사과학자가 1100명 정도 배출됐다고 한다. 우리 인구가 미국의 7분의 1 정도니까, 이걸 감안하면 우리는 150~200명 정도를 배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 나오는 숫자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10~15명, 서울대와 연세대를 합해서 8~10명, 나머지 대학들을 다 합해서 10명 정도다. 모두 합해도 1년에 35명 정도에 불과하다.”
선경 : “10%, 3% 같은 숫자를 이야기하는데 기초의학을 육성하자는 것인지, 임상의사를 과학자로 만들자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지금 의대생들에 기초과학을 가르치려고 해도 가르칠 사람이 없다. 의대 교수들은 진료만 했던 사람들이다. PhD와의 연계 구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이런 것 없이 임상의사를 독립적인 연구자로 키우는 건 얼치기를 만드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이영완 : “미국과 한국의 어떤 부분이 다르길래 이렇게 차이가 큰 건가?”
이민구 : “제도적인 지원에서 차이가 크다. 미국은 1964년부터 의사과학자 육성프로그램(MSTP)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의 150개 의과대학 중에 R&D(연구개발)에 관심있는 50여개 의과대학이 MSTP 지원을 받는데, 이들 의과대학에서는 의사과학자가 배출되는 비율이 10%에 달한다. MSTP와 별개로 최고 수준의 의과대학과 연구중심대학이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해 협력하는 프로그램도 많다. 하버드대학과 MIT가 함께 하는 HST(Health Sciences and Technology) 프로그램이 대표적이고, UCLA(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와 칼텍(캘리포니아 공대)도 의사과학자 육성을 위해 협업하고 있다. 한국에도 좋은 의대와 연구중심대학이 많은데 협업이 더 늘어야 한다.”
선경 : “어떤 학문이든 산업이 살아 있어야 의미가 있다. 대한민국 제약·바이오 산업이 너무 약하다. 전 세계 시장 점유율이 지난해 1.43%에 그쳤다. 바이오, 제약, 의료기기, 솔루션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다. 이걸 어떻게 돌파할 것이냐가 중요하다. 국내 제약 바이오 기업들은 대부분 카피(복제) 제품을 만든다. 신약은 외국계 기업만 가지고 있다. 외국계 기업은 국내에서 번 돈을 국내에 재투자하지 않고 그냥 가져간다. R&D와 이노베이션센터, 제조공장을 한국에 두는 외국계 기업을 찾기가 힘들다. 그나마 긍정적인 부분은 국내 시장 성장률이 전 세계 평균의 두 배 이상이라는 점이다. 국내 기업이 시장과 함께 성장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의사들이 기여해야 한다.”
이명식 : “사실 전 세계 의과대학의 교육 시스템은 비슷비슷하다. 우리나라 의대 교육이 잘못됐다는 생각은 안 한다. 의대 교육에는 문제가 없다. 의대 교육이 아니라 대학원의 역할이 중요하다. KAIST든 기존 의과대학이든 새로운 기회를 만드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민구 : “의사과학자에 대한 모티베이션(동기부여)이 다르다. 요즘 젊은 세대는 아주 솔직하다. 의대생에게 연구를 하라고 하면 뭐가 좋은 지를 묻는다. 미국의 의대생들은 의사과학자를 하려고 하고, 한국의 의대생들은 의사과학자를 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보상이 중요한 차이다. 미국은 필수의료가 인기가 많다. 외과, 특히 신경외과가 가장 인기 학과다. 하버드의 신경외과 레지던트(전공의)는 대부분 의사과학자(MD-PhD)다. 연구를 해야 자기 인생이 달라진다는 걸 안다.”
◇의사과학자가 벌어온 연구비, 급여로 쓸 수 있게 해야
이영완 : “보상의 문제가 중요한 것 같다.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해 어떤 보상 체계를 만들어야 할까.”
유욱준 : “미국도 의사가 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다. 학비 부담 때문에 의사가 되는 사람들이 보통 50만달러의 빚을 지고 시작한다는 말도 있다. 예전에 시카고대는 의사과학자가 되는 학생들에게는 학비를 전액 지원해줬다. 의대생 중에 의사과학자를 100명 정도 뽑는데 의대생 중에 1등부터 100등까지가 의사과학자에 지원했다고 한다. 이런 지원 제도가 필요하지 않겠냐.”
이민구 : “의사과학자도 대학 병원의 교원으로 일해야 한다. 교원으로 일하더라도 연구가 주 업무가 돼야 하는데, 우리 현실에서는 임상 교원으로 있으면서 본인의 업무 시간의 50% 이상을 연구에 쓰면 직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의사과학자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 체계를 만들어줘야 한다. 미국의 경우 의사과학자들의 봉급이 임상의사의 80% 수준을 유지한다. 우리도 100% 진료만 하는 임상의사가 받는 급여의 80% 정도는 의사과학자에게 보장해줘야 한다. 국가 R&D 사업에서 출연연의 PBS(연구과제중심운영제도)를 제외하면 연구자의 월급을 직접 지원하는 제도가 한국에는 없다. 의사과학자를 키우려면 이 부분부터 바꿔야 한다.”
선경 : “고려대학교병원이 임상으로는 빅5 병원과 경쟁이 어렵다 보니 아예 전략을 바꿔서 연구중심병원으로 돌아섰다. 연구에 전념할 전담의사를 뽑아서 일주일에 외래는 2일만 하고 나머지는 연구만 할 수 있게 했다. 연구에 집중하는 의사의 급여는 대학이 책임지고 직접 지원하고 있다. 처음에는 내부에서 반대가 많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연구중심병원으로 고대병원이 확실히 변신에 성공했다. 이런 시도가 고대병원 한 곳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국가 제도로 정착돼야 한다.”
이영완 : “구체적인 보상 방안은 무엇일까.”
유욱준 : “의사과학자를 제대로만 키우면 쓰는 경비의 두 배 이상은 벌어온다. 의사과학자를 육성만 하면 학교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이들이 벌어오는 연구비가 이들의 개인적인 급여나 이익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의사과학자가 연구비를 많이 받으면 오버헤드(간접비)를 통해서 급여를 맞춰줘야 한다. 그러면 의사과학자가 임상의사보다도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한 게 문제다.”
선경 : “맞다. 대학 산학협력단 관련 법률의 개정이 필요하다. 병원에서 나온 지적재산권이 본교 산학협력단으로 간다. 대학병원에 산학협력단이 있기도 하지만 본교 분원 성격이다. 연구비 관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사과학자 위한 병역 특례 제도 만들어야
이영완 : “보상 체계만 개선하면 될까.”
이민구 : “병역 제도 개편도 필요하다. 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보건복지부가 학생 한 명 당 1억원씩 들여서 의사과학자 후보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중 절반이 군대를 가버렸다. 올해 내과 군의관이 부족할 것 같다며 군이 전문요원을 금지시키고 군의관으로 데려간 것이다. 지금도 의사과학자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국방이나 지역의료가 여전히 국가 정책에서 의사과학자보다 우선 순위에 있다. 의사과학자를 키우겠다는 생각 자체가 부족한 것이다.”
선경 : “병역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사과학자는 군대를 가는 순간 경력이 단절된다. 전문의까지 하고 막 연구에 집중해야 할 나이에 군대에 가버리는 것이다. 의사과학자를 위한 군 전문의 연구요원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경력 단절 문제를 풀어야 한다.”
이민구 : “현재 의사들을 위한 병역제도가 세 가지가 있다. 군의관, 보건의, 병역행정 전담의사 세 가지다. 의사과학자가 지금은 35명인데, 이걸 150명, 200명으로 늘린다고 하면 현재 있는 교육부나 과기정통부 산하 전문연구요원 제도로는 커버할 수가 없다. 지금 있는 전문연구요원을 의사과학자에 배정한다고 하면 공과대학이나 자연대학에서 난리가 날 것이다. 의사과학자를 위한 별도의 제도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유욱준 : “보다 확실한 해결책이 있다. 나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의 사회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 과학기술이 국방에서 중요해지면서 국방 분야에 근무하는 연구자들을 위해 어떤 제도 개선을 할 수 있는지 들여다보고 있다. 지금은 형평성 때문에 군 복무 기간에 모든 종류의 학위 활동이 금지돼 있다. 군 관련 연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걸 풀어주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 기업이든 대학이든 국방 관련 연구를 하는 연구자는 다 현역 신분으로도 풀타임(전일제) 연구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의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컨센서스(합의)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의사과학자도 현역 신분으로 연구를 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영완 : “단순히 의사과학자를 늘려야 한다는 이야기로만 봤는데, 자세히 이야기를 나눠보니 이를 위해서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보상 체계부터 산업 육성, 병역 제도 개선 등 많은 부분이 논의돼야 할 것 같다.”
이민구 : “디테일을 놓치면 안 된다. 의사과학자 인원을 늘리는 건 좋지만, 서울대가 하려던 것처럼 의과학과를 별도로 만들어서 의사과학자를 따로 뽑으면 의대생 안에서 계급이 나눠질 우려가 있다. 의대생 중에서 똑똑하고 동기부여가 확실한 사람들을 의사과학자로 양성하는 게 중요하다.”
유욱준 : “의사과학자 양성이 꼭 필요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다양한 방안이 있겠지만 무엇이 됐든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 게 중요하다. 지금이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해 정말 중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명식 : “일본의 동경대나 오사카대를 보면 의사과학자 양성 체계가 잘 갖춰져 있다. 우리도 서울대나 연세대 같은 의과대학이 시스템을 잘 만들면 (의사과학자 양성이) 가능하다고 본다. KAIST 같은 과학기술원은 과학기술원대로 의사과학자 양성에 나서고, 기존 의과대학들은 의과대학대로 맞는 시스템을 찾아서 육성하는 게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