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이론 물리학자 피터 힉스 에든버러대 명예교수가 8일(현지시각)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AP=연합뉴스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이론 물리학자 피터 힉스 에든버러대 명예교수가 8일(현지시각)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힉스 명예교수는 현대 물리학의 근간을 이루는 ‘힉스 입자’를 예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대는 9일 성명을 내고 “힉스 교수가 짧게 질환을 앓고 나서 지난 8일 자택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힉스 교수의 절친한 동료 물리학자였던 앨런 워커 에드버러대 교수는 “혈액 관련 질병을 앓았다”고 전했다.

힉스 교수는 지난 1964년 35세 조교수 신분으로 힉스 보존(boson·기본입자)의 존재를 예측했다. 힉스 입자는 우주 탄생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가설 중 가장 유력한 표준 모형(Standard Model)을 설명하기 위해 정의된 입자다.

표준 모형에 따르면, 우주와 자연계는 중력·전자기력·약력(약한 핵력)·강력(강한 핵력) 등 네 가지 힘과 그 힘들을 매개하는 입자들로 이뤄져 있다. 이 입자들은 구체적으로 각각 6개로 분류되는 쿼크와 렙톤이라는 12개의 소립자로 구성된다. 이 소립자들이 나름의 질량을 갖고 또 서로 질량이 다른 이유를 설명하려면 새로운 입자가 존재해야 하는데, 이 역할을 하는 것이 힉스 입자다. 힉스 입자로 인해 비로소 표준 모형이 제대로 정립돼 소립자와 우주를 형성하는 힘에 대한 지금까지의 모든 지식이 축적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론적으로는 검증된 힉스 입자를 실제로 발견하거나 측정하기가 극도로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다른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리언 레더먼이 저서에서 힉스 입자를 ‘빌어먹을(Goddamn) 입자’로 불렀다가 출판사의 권유로 ‘신(God)의 입자’로 바꿨는데, 이것이 힉스 입자의 별칭으로 굳어졌다.

힉스 입자는 힉스 교수가 그 존재 가능성을 예측한 지 60여년 만인 지난 2013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과학자들의 실험을 통해 그 존재가 학술적으로 공식 확인됐다. CERN은 힉스 입자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둘레 27㎞의 강입자가속기(LHC) 터널에서 입자를 충돌시켜 137억년 전 빅뱅을 재현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 휴대폰도 이메일도 없는 소박한 과학자

힉스 교수는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고 소박한 인물로 알려졌다. 힉스 입자가 증명된 지난 2012년 7월 4일에는 CERN의 강의실에서 기립 박수를 받으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제 생애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텔레비전도 없었고 이메일이나 휴대폰도 사용하지 않았다. 동료 앨런 워커 교수가 힉스 교수의 ‘디지털 눈동자’ 역할을 해왔다.

힉스 교수는 지난 1929년 5월 29일 영국 뉴캐슬어폰타인에서 BBC 음향 엔지니어인 아버지 토마스 웨어 힉스와 전업 주부였던 거트루드 모드 힉스의 아들로 태어나 브리스톨에서 자랐다. ‘양자역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이론 물리학자 폴 디랙과 같은 학교인 코담 문법학교에 다닐 때 물리학에 관심을 두게 됐다. 힉스 교수는 17세에 시티 오브 런던의 학교로 전학해 수학을 공부했고, 1년 후 킹스 칼리지 런던에 입학해 1947년 물리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954년 분자와 열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에든버러대학,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임시 연구직을 거쳐 지난 1960년부터 에든버러 대학에서 정규직 강사로 일했다. 대학 시절 스코틀랜드 고원으로 히치하이킹 여행을 떠나면서 에든버러를 마음에 들어 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벨상 수상 이전에도 그는 에든버러의 살아있는 관광 명소이자 걸어 다니는 과학 기념물로 자리 잡았으며, ‘도시에 대한 탁월한 공헌’으로 2011년 에든버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에든버러대에 자리를 잡은 후 핵 군축 캠페인과 그린피스에서 정치적으로도 활발히 활동했지만, 두 단체가 자기 뜻에 비해 너무 급진적으로 성장하자 두 단체에서 탈퇴했다. 그러나 군축 운동을 하면서 동료 활동가인 조디 윌리엄슨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1963년 그와 결혼했다. 아내는 지난 2008년 사망했는데, 아내와의 사이에서 컴퓨터 과학자인 크리스토퍼와 음악가인 조나단 두 아들을 두었다.

이휘소(1935~1977) 박사는 미국 페르미 국립가속기연구소에서 연구하던 1972년 발표한 논문에서 힉스 입자란 말을 처음 썼다./미 페르미 국립가속기연구소

◇ 韓 출신 이휘소 박사가 지어준 이름 ‘힉스 입자’… 정작 본인은 당황

에든버러대에서 힉스 교수는 자신의 관심사를 화학과 분자에서 소립자로 바꿨다. 연구 초기에는 우주의 4가지 힘 중 하나로 원자핵을 서로 붙잡는 힘인 강력(强力)에 관심이 있었으나, 힘을 전달하는 입자인 보손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 이 주제로 논문을 썼을 때는 학술지 등재를 거절당했지만, 논문 마지막에 힉스 입장의 존재를 예측하는 새 단락을 추가하고 나자 학술지에 등재될 수 있었다.

사실 브뤼셀 자유대학의 프랑수아 엥글레르와 로버트 브루트가 비슷한 아이디어로 힉스 교수보다 7주 먼저 출판에 성공했고, 그 이후로도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의 톰 키블, 로체스터 대학교의 칼 하겐, 브라운 대학교의 제럴드 구랄닉 등 세 명의 물리학자가 힉스 교수에 앞서 논문을 발표했다. 후에 힉스 교수는 “이 논문들을 먼저 봤더라면 나는 논문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힉스 교수의 아이디어에 ‘힉스 입자’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한국 출신의 세계적 입자물리학자인 고(故) 이휘소(영문명 벤자민 리) 박사 덕분이었다. 1971년부터 세계 최고의 물리학 연구기관인 페르미 국립가속기 연구소에서 입자물리학 연구팀을 이끌었던 이휘소 박사는 1972년 ‘힉스 입자에 미치는 강력의 영향’이라는 논문을 국제학회에서 발표하면서 피터 힉스 박사의 이름을 따 이 입자를 처음 ‘힉스’라고 지칭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힉스 입자가 자연계가 질량을 갖게 하는 근본 입자로, 질량이 양성자의 110배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새 입자에 자신의 이름이 붙자 힉스 교수는 당황했고, 다른 연구 그룹은 불쾌해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그는 한동안 이 이론에 기여한 다른 이론가들, 앤더슨·브루트·엥러트·구랄닉·하겐·키블·후프트와 자신의 이름을 따 ‘A·B·E·G·H·K·H 메커니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는 힉스 입자 이후에는 힘의 통합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초대칭성이라는 새 이론을 연구하려고 했지만, 후에 “어리석은 실수”라고 자평했다. 힉스 교수는 나중에 BBC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노벨상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면 생산성 부족으로 오래전에 해고당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힉스 교수는 지난 1996년 교수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계속 가르쳤지만, 당시로서는 힉스 입자에 대해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지난 1999년 영국 왕실의 기사 작위 수여 제의를 거절했지만 2012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작위 없는 ‘명예의 동반자’ 훈작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