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증원을 둘러싼 의사단체와 정부의 갈등이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일각에선 증원 규모를 당초 정부가 발표한 2000명에서 줄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의대 증원 축소 기류에 과학기술의학전문대학원(과기의전원) 설립도 '빨간불'이 켜지는 모양새다.
29일 관가와 과학기술계에 따르면, 최근 정부 안팎에서는 과기의전원에 대한 함구령이 내려졌다. 과기정통부가 올해 주요 업무 추진계획을 발표한 2월 중순까지만 해도 과기의전원 설립이 급물살을 탈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는데, 불과 몇 주 만에 분위기가 정반대로 바뀌었다.
과기의전원 설립을 추진하는 한 과기원 관계자는 "당분간 과기의전원에 대해 공식적으로 코멘트를 하기가 껄끄럽다"며 "정부에서도 불필요한 논란을 만들지 말라는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 한 정부 관계자도 "의대 증원을 둘러싸고 사회적인 갈등이 커지는 상황에서 과기의전원이 득을 본다는 식의 전망이 나오는 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며 "당분간 과기의전원 논의는 수면 아래에 있을 것 같다"고 전했다.
과기의전원은 의사과학자 양성을 목표로 과기원들이 숙원 사업으로 추진 중이다. 의사과학자는 기초의학과 과학 연구를 함께 하는 의사로 임상의와는 달리 연구에 초점을 둔다. 약물 전달 시스템의 세계적 석학이자 모더나 공동창업자인 로버트 랭거 교수처럼 해외에서는 의사과학자가 바이오 산업의 혁신을 이끌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임상의에만 인력이 몰려 의사과학자가 턱없이 부족하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비롯한 과기원은 과기의전원 설립을 계속 시도했지만, 의료계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하지만 이번에 정부가 의대 증원 계획을 밝히면서 과기의전원 설립도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커졌다. 실제로 대통령실 관계자는 지난 2월 8일 백브리핑에서 "지금 진료의사 수요만 가지고 증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이오산업 생명과학 분야를 위한 의사과학자 등 그 이상 훨씬 더 많은 의사 수요가 있다"며 "의대 증원을 통해 의사과학자 양성에 숨통이 트이기를 진정으로 바란다"고 말했다.
의대 증원 규모인 2000명 가운데 일부를 과기의전원에 돌릴 수 있다는 걸 시사하는 발언이다. 한 과기원 고위관계자도 "2000명의 10% 정도는 과기의전원에 돌릴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의사단체의 반발이 이어지고 의료계의 혼란이 커지면서 증원 규모 자체가 축소될 가능성이 커졌다. 전국 40개 의대 학장단체는 지난 28일 대학이 수용할 수 있는 의대 증원 규모로 350명을 제시했다. 정부는 2000명을 고수하고 있지만, 의료계의 혼란이 계속되면 정부도 타협안을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 증원 규모가 줄어들면 의사과학자나 과기의전원에 돌릴 수 있는 몫도 그만큼 줄어들 거나 아예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
과기원 의과학대학원의 한 교수는 "처음 계획대로 진행되더라도 2026년에나 과기의전원 설립이 가능한데 이렇게 규모가 줄고 과기의전원은 논의에서 밀려나면 다시 몇 년이 더 걸릴 지 알 수 없다"며 "정부가 첨단 바이오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하는데 핵심 인력인 의사과학자는 언제 키우겠다는 건지 답답하다"고 털어놨다.
과기원들은 저마다 과기의전원 설립을 위해 바쁘게 물밑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울산과학기술원(UNIST)은 동남권원자력의학원과의 통합을 검토하고 있고, KAIST도 세브란스병원 등 수도권 병원과의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광주과학기술원(GIST)도 화순전남대병원과 협력을 검토 중이다.
임기철 GIST 총장은 "과기의전원에 정원을 배정하면 의사 수급뿐 아니라 미래 산업과 경제를 함께 챙긴다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줄 수 있고, 갑작스러운 의사 공급 증가의 완충 역할도 할 수 있다"며 "의대 증원 규모가 줄어들더라도 1년에 100명 정도는 의과학 분야에 배정해주면 의료 현장과 바이오 산업계 모두에서 활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