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암살자’라는 별명을 가진 질병이 있다. 갑작스럽게 뇌에 혈액을 공급하는 혈액이 막히거나 터져 뇌 조직이 손상되면서 나타나는 뇌졸중은 국내에서는 단일 질환으로 사망 원인 1위에 올라 있다. 뇌졸중 치료의 골든타임은 4시간 30분이다. 증상이 나타나고 골든타임이 지나 병원에 도착하면 생존률은 급격히 떨어진다. 다행히 제 시간에 병원에 도착해 치료를 받아도 환자와 가족들은 안심할 수 없다.

뇌졸중이 한번 발생한 환자는 재발하는 경우가 흔하다. 특히 퇴원 후 일주일이 가장 위험하다. 이 시기 의료진의 도움을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면 진료를 다시 받는 2주까지 환자는 매일 걱정의 밤을 보낸다. 힘들게 살려 놓은 환자를 집에 보내야 하는 의료진도 같은 마음이다.

서울 유일의 실증 특례 지구인 홍릉특구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도전적인 의료 기술을 시험하고 있다. 실증특례는 법으로 금지하고 있거나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은 신기술을 시험·검증할 수 있도록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제도다. 국내에 비대면 의료기술로 실증 특례 사업을 하는 곳은 강원도와 홍릉특구 뿐이다.

고려대 안암병원 의료진이 홍릉특구 입주 기업인 이센에서 개발한 비대면 진료 보조 시스템을 실증하고 있다. 홍릉특구는 서울권 유일의 실증 특례 구역으로 법적으로 금지됐거나 제한된 기술의 효능 시험이 가능하다./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이전에 없던 새로운 의료 기술이 나온다

유의식 이센 대표는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뇌졸중 수술을 받은 후 퇴원한 환자의 증세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약은 잘 듣는지, 합병증은 없는지 확인하는 시스템의 유용성을 확인하고 있다”며 “환자의 보행 패턴 데이터를 수집해 의료진이 환자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데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이센은 2018년 창업해 2022년 홍릉특구에 입주한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이다. 이전에는 관절 수술을 받은 환자의 회복을 돕는 디지털 헬스케어 장치 ‘이센케어’로 사업을 했다. 이번 실증의 목표는 이센케어와 비대면 진료 보조 플랫폼(기반 기술) ‘미리케어’를 결합한 시스템을 이용해 퇴원 후 뇌졸중 환자의 진단을 보조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유 대표는 “홍릉특구 입주를 계기로 기술의 적용 범위를 어떻게 넓힐 수 있을지 고민했다”며 “홍릉특구의 강점인 실증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비대면 진단 보조 시스템 개발에 착수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유의식 이센 대표가 지난 16일 조선비즈와 만나 "홍릉특구에서 우리가 개발한 기술을 실증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이센은 뇌졸중 환자의 퇴원 후 신체 움직임 데이터를 의료진에게 진단 보조 데이터로 제공하는 시스템을 고려대 안암병원과 실증하고 있다./이센

뇌졸중 진단 보조 장치의 실증은 홍릉특구의 기술핵심기관 중 한 곳인 고려대 안암병원 재활의학과와 신경과에서 진행 중이다. 지난해 9월 시작한 실증에는 5개월 동안 40여명의 환자가 참여할 정도로 의료진과 환자의 관심이 크다. 이번 실증 사업은 올해까지 2년차를 진행한 후 평가를 통해 2년을 더 연장할지 결정한다.

유 대표는 “처음에는 의료진도 익숙하지 않고 환자에게도 생소해 참여율이 낮았으나 점점 참여 환자 수가 늘고 있다”며 “우리 기술이 의료진과 환자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점점 확신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 70대 환자는 자신의 대면 진료 때문에 자녀들이 휴가를 써야해 눈치를 봤는데, 이제는 집에서 정확한 건강 상태를 바탕으로 진단받을 수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말했다.

이번 실증에 참여하는 기관은 병원 만이 아니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는 환자의 보행 패턴으로부터 뇌졸중 후유증을 확인하는 센서 기술을 함께 연구했다. 이센은 보행 패턴을 통한 관절 건강 분석 기술은 갖추고 있었으나 이를 뇌졸중 후유증과 연관시킬 기술은 부족했던 상황이다. 다양한 기관과 기업이 한데 모여 있는 홍릉특구의 환경이 차세대 의료 기술 개발의 원동력이 된 셈이다.

홍릉특구의 입주 기업이 모여 있는 고려대 메디사이언스 파크 전경. 홍릉특구는 산·학·연·병 인프라(기반 시설)를 통해 의과학자들의 창업을 지원하고 있다. 이들은 홍릉특구의 네트워킹, 투자 유치, 지적재산권(IP) 지원을 가장 큰 장점으로 꼽았다./고려대 의료원

◇산·학·연·병 모인 의과학자 창업 요람

홍릉특구에는 다른 클러스터에서 찾기 어려운 대형 병원이 여럿 있다. 고려대 병원과 경희대 병원이 홍릉특구에 참여하고 있으며 원자력의학원과도 스타트업 지원을 위한 협약을 맺었다. 이런 강점을 살려 의과학자들의 창업 기업의 참여도 활발하다.

고려대 의료원과 경희대 의료원과 관련된 창업기업 중 홍릉특구에 입주한 기업은 35곳에 달한다. 이중 대부분은 의과학자들이 창업했다. 이들은 왜 홍릉특구를 선택했을까.

비대면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인 피플스헬스를 창업한 김은선 고려대 안암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홍릉특구는 연구기관과 병원이 함께 참여하고 지역적으로도 매우 가까워 협업하기 좋은 환경이라는 강점이 있다”며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의사과학자들이 창업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피플스헬스는 전자문진 서비스와 외국인 환자관리 서비스를 개발한 스타트업이다. 위치와 언어 장벽을 뛰어넘어 누구든 어디서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돕는 시스템이다. 김 교수는 홍릉특구를 통해 기술개발 자금을 지원받았다. 외부 사업을 포함해 3억5000만원에 달하는 규모다.

김 교수는 “입주 공간도 지원받고 다른 연구자들과 만나 어떤 사업을 하는지, 투자를 받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하는지 정보 교류를 하고 있다”며 “홍릉특구가 아니었다면 쉽게 모이기 어려운 만큼 네트워크 측면에서도 도움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내분비 대사 질환에 대한 디지털 치료제를 개발하는 스타트업 오디엔의 대표를 맡고 있는 이상열 경희대 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도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는 산·학·연·병 네트워크를 홍릉특구의 강점으로 꼽았다. 이 교수는 “홍릉은 창업 인프라 관점에서 봤을 때 강남 같은 지역에는 못미친다”면서도 “대신 홍릉에서는 스타트업과 연구기관, 대학, 병원이 함께 성장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해외 진출을 노리는 국내 바이오 스타트업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한국보다 규제가 자유로운 해외 기업들과 경쟁을 하려면 국내 스타트업도 자신들의 기술을 증명할 기회가 필요하다. 홍릉특구에서 할 수 있는 특례 사업이 밑바탕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지난해 8월 열린 홍릉 투자기관협의회 간담회에서는 홍릉특구 입주 기업에 대한 투자 확대 방안과 네트워킹 방안이 의논됐다. 홍릉특구는 산·학·연·병 네트워크는 물론 투자 지원, 창업 프로그램 운영 같은 풍부한 지원이 강점으로 꼽힌다./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이 교수는 “바이오메디컬 스타트업은 필연적으로 병원이나 의대와 연계해 실증을 거쳐야 세계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다”며 “이런 일을 한 곳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가 있는 곳이 바로 홍릉”이라고 말했다.

연구자가 창업하면서 자칫 놓치기 쉬운 지적재산권(IP), 투자 유치, 경영 관련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기회도 홍릉특구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유전체 분석 스타트업 멘델의 대표인 오범석 경희대 의대 교수는 “해외 사업을 위해 특허를 등록해야 했는데 홍릉특구를 통해 만난 변리사의 도움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멘델은 사람들이 가진 유전자 변이를 분석해 어떤 질병에 취약한지 건강 정보를 제공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멘델이 개발한 알고리즘을 아마존 클라우드에 올려 이를 사용하는 기업으로부터 수익도 내고 있다.

오 교수는 “홍릉특구를 통해 투자자들과도 만날 수 있다”며 “앞으로 한국을 대표할 바이오 스타트업이 홍릉에서 태어나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