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의 입법부 격인 유럽의회가 ‘유전자 교정 작물(gene edited crop)’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기로 했다. 다만 EU의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가 처음 제시한 완화안보다는 규제가 추가됐다.
유럽의회는 지난 7일(현지 시각) 유전자 교정을 통해 만들어진 농작물에 대한 규제 감독 완화안을 표결 처리했다. 찬성 307표, 반대 263표로 비교적 근소한 차이로 통과됐으며 기권은 41표였다. 이번 결정은 EU가 그동안 유전자 변형과 조작에 대해 보수적이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유전자 교정은 효소 단백질인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동식물의 유전정보가 담긴 DNA에서 특정 부위를 잘라내 원하는 특성을 구현하는 방법이다. 유럽종자협회(Euroseeds·유로시드)는 이번 결정이 농업의 지속가능성과 혁신을 높일 수 있는 중요한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예를 들어 유전자 교정 식물은 더 많은 수확량을 생산하고 해충과 병원균에 더 잘 저항해 살충제의 필요성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유럽의회에서 반대 표결에 나선 녹색당이나 그린피스와 같은 환경론자들은 이번 결정으로 더 강력한 농업 독점이 나타날 수 있다며 비판했다. 이 같은 비판론에 집행위가 제시한 완화안도 일부 수정됐다.
지난해 7월 집행위의 초안은 유전자 편집을 20회 미만 시행한 ‘새로운 유전체 기술(NGT)’에 대한 규제 완화에 방점을 두었다. 기존의 유전자변형농산물(GMO)이 외부 생물의 유전자를 주입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면, NGT는 주로 작물 자체 세포 내의 유전자나 자연 교배될 수 있는 작물의 유전자 염기서열을 편집해 GMO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간주했다. 완화안은 NGT를 GMO 규제에서 면제한 것이다.
유럽에서 전통적으로 재배된 식물은 유럽에서 특허를 받을 수 없었다. 집행위는 NGT 작물에 특허를 출원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건강·환경 위험 평가 대상에서 제외하고, 종자가 아닌 작물에는 GMO처럼 이력 조회와 상표 표시를 하지 않아도 되도록 규제를 완화하고자 했다.
유럽의회는 NGT 작물을 별개로 인정하는 데는 뜻을 모았지만, 특허 출원이 인정될 경우 소규모 농가들이 대형 종자회사에 예속될 수 있다며 반대했다. 또 작물에 대한 이력 조회나 상표 표시도 하도록 했다. 위험 평가는 질병 저항성과 온난화 적응 등 농업의 지속 가능성을 개선하는 데 기여할 때만 면제토록 하고, 환경 영향 감시 의무를 부여하는 한편 건강에 위험을 미칠 경우 즉시 시장에서 퇴출하는 방안도 포함했다.
집행위의 완화안보다 후퇴했음에도 불구하고 학계는 이번 결과를 환영하는 분위기다. 150개 이상의 유럽 연구 기관·대학·협회로 구성된 단체인 ‘유전자 교정을 통한 유럽의 지속 가능한 농업(EU-SAGE)’의 전무이사 오아나 디마는 “과학계에는 정말 고무적인 일”이라고 말했다.이 단체는 규제 완화를 주도해 왔다.
디마 전무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당시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의 보급과 성공으로 유럽의회의 유전자 교정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었고, 기후변화나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공급망의 문제로 식량 생산 문제가 본격적인 화두에 오르면서 의회가 제한적으로나마 NGT를 승인했다고 분석했다. 특허 문제의 경우에도 NGT 법안과는 별개로 EU의 특허 규제 틀 안에서 논의할 문제라는 입장이다.
문제는 법안의 시행 시기다. EU의 법안이 시행되려면 집행위와 유럽의회 외에도 소속 27개 각국을 대표하는 이사회의 승인도 얻어야 하며, 이사회를 통과한 후에는 집행위·유럽의회·이사회 간 3자 협상 과정도 거쳐야 한다. 이번 완화안은 이사회에서도 여전히 이견이 있어 법 시행 역시 다소 미뤄질 전망이다. 디마 전무는 “오는 6월 유럽의회 선거 전에 법이 시행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