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연구개발(R&D)을 수행하는 기업들이 청년 연구원을 의무 채용하도록 한 제도가 R&D 예산 삭감 여파로 폐지가 검토되고 있다. R&D 예산 삭감으로 기업의 부담이 커지자 정부가 나서 이 제도의 한시적 폐지를 검토하고 나선 것이다. 기업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취지이지만, 가뜩이나 좁은 취업문으로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에게 피해가 돌아가게 생겼다. R&D 예산 삭감의 유탄이 청년 일자리로 튀는 모양새다.
22일 과학기술계에 따르면 정부는 R&D 예산을 지원받는 기업에게 적용했던 ‘청년 의무 채용’ 제도를 올해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정부는 2018년 청년 연구인력의 고용을 활성화하기 위해 정부 R&D 사업 지원을 받는 기업에게 청년 고용을 의무화했다. 이에 따라 기업은 총 사업기간 동안 지원받는 예산 5억원 당 청년 연구자 1명을 채용해야 했다. 가령 총 예산이 15억원인 연구 사업에 참여하는 기업이 10억원을 지원 받는다면 이 기업은 2명의 청년 인력을 신규로 채용해야 하는 식이다. 11개 정부 부처가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유도하기 위해 ‘청년고용 친화형 R&D 3종 패키지’ 방안을 내놓으며 포함된 내용이다.
그러나 올해 정부 R&D 예산 삭감으로 기업에 지원되는 예산 규모가 대폭 줄면서 청년 의무 고용 조항이 일부 과제에서 폐지된다. 모든 정부 R&D 사업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업 주관 부처가 과제의 특성을 고려해 의무 조항을 삭제할 과제를 선정하는 방식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원하는 과제 중 일부는 이미 참여 연구자들에게 이같은 내용의 공지가 이뤄졌다. 정부 R&D 사업을 수행하는 한 기업 관계자는 “올해 우리 기업이 수행하는 과제에서는 청년 의무 고용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공지를 지난주에 받았다”며 “계속 과제의 예산 삭감으로 고민이 컸는데 인건비 지출이 줄어 연구비 활용에 다소 숨통이 트일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가장 많은 R&D 예산을 사용하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청년 의무 고용 조항을 일부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올해는 사업별로 청년 의무고용 제도 반영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며 “조만간 사업 공고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부와 과기정통부 이외의 다른 부처도 제도 완화 카드를 만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제도는 지난 6년간 청년 연구자 채용에 큰 도움이 됐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다만 올해는 정부 R&D 예산 삭감으로 기업이 느끼는 부담감을 줄여주기 위해 제도 완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들이 주로 수행하는 산업부 R&D 사업은 예산이 평균 40~50% 삭감됐고, 일부 과제는 90% 이상 삭감된 사례도 있다.
과학기술계 한 관계자는 “정부가 중소기업을 R&D 카르텔과 비효율의 축으로 지목하면서 R&D 예산 삭감의 타격을 중소기업들이 많이 받았다”며 “기업이 겪는 연구비 부족을 다소 완화하면서도 일종의 여론 달래기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청년 연구자들의 일자리에는 부정적인 영향이 불가피해졌다. 청년 의무 고용 제도로 취업한 경험이 있는 한 연구원은 “의무 고용 조항이 없다면 대부분 기업들이 청년 연구자를 뽑지 않고 기존 인력으로 사업을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며 “청년 연구자들이 취업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 감소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