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연구개발(R&D) 예산을 효율화한다며 연구자들의 회의비 중 식비 사용을 제한하고 나섰다. 연구 활동에 사용되는 회의비와 식비 증빙서류 제출을 면제해주는 제도 개선안을 시행한 지 6년 만에 과거로 회귀한 것이다. 카르텔을 문제 삼아 R&D 예산을 대폭 삭감한 후폭풍이다. 정작 연구계의 카르텔을 지적하며 예산 삭감에 앞장섰던 조성경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1차관은 최근 한끼에 수십만원에 달하는 고급 식당에서 법인카드를 부정 사용했다는 의혹에 휩싸여 있다.
17일 과학기술계에 따르면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은 지난 15일 ‘회의비 중 식비 사용 관련 자주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 안내’라는 공지를 게재했다. 이 공지는 연구개발비 사용 기준에서 회의비 중 식비 사용은 금지됐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규정은 지난해 8월 정부가 발표한 ‘정부 R&D 제도혁신 방안’의 후속 조치로 지난달 28일 국가연구개발사업 연구개발비 사용 기준이 개정되면서 시행됐다. 개정된 기준에 따르면 수탁 과제와 출연연 기본사업을 수행하는 연구자는 회의비 중 식비와 다과비를 계상할 수 없다. 외부 인원이 참석하는 회의에 한해서는 사전에 내부 결재를 받은 후에만 식비를 사용할 수 있다.
정부는 불필요하게 연구비가 낭비되는 것을 막고 연구비 사용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목적으로 이번 조치를 실시했다. 앞서 정부는 2018년 연구 활동에서 사용되는 회의비와 식비의 증빙서류 제출을 면제해주는 제도 개선안을 내놓았는데, 6년 만에 연구자의 회의비와 식비를 제한한 것이다.
KISTEP에 회의비와 식비와 관련해 답변이 올라온 배경에는 연구자들의 빗발치는 문의가 있다. 연구자들은 주로 외부 기관 연구자와의 회의를 열거나 야근·특근 학생연구원의 식대로 회의비 중 식비를 사용한 것으로 파악됐다. 기관 간 협력과 연구원 사기 진작처럼 연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용도다. 하지만 회의비와 식비 사용이 제한되면서 새로 재원 마련이 필요해지자 연구자들이 연구재단에 문의한 것이다.
미국의 경우 연구 활동에 쓰이는 비용을 인건비와 직접비로만 구분한다. 한국처럼 연구비를 세부적인 용도로 나눠 감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연구 현장에서는 정부 관료들이 연구자를 불신하면서 불필요한 규정이 많아졌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미국은 연구비를 자율적으로 운영하도록 하는 대신, 부정 사용이 적발되면 강력한 제재 처분을 내린다.
한 연구중심대학 교수는 “회의비와 식비가 작은 부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외부 기관 연구자와 형식적인 회의보다는 식사를 함께하면서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는 경우도 많다”며 “연구자끼리 회의 이후 식사를 하면서 관계를 형성하는 건 해외도 마찬가지인데 이런 부분이 무시되는 거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연구자들 모두를 부정한 사람으로 몰면서 여러 가지 규정을 만들 게 아니라 적발되면 개인별로 확실하게 제재하는 방식이 더 적합하다”며 “미국처럼 신뢰 기반의 사회이어야지 불신이 바탕이 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최근 조성경 과기정통부 1차관이 법인카드를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가운데 연구자들에게만 유독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조 차관의 업무추진비 사용 내역이 논란이 되고 있다. 조 차관은 자택 인근 고깃집과 중식당, 일식집 등 고급 식당에서 한끼에 수십만원의 비용을 지출했다. 조 차관이 제출한 업무추진비 제출 내역에 따르면, 조 차관은 한 식당에서 9명이 26만원을 지출했다고 적었는데 이 식당은 1인당 9만8000원의 코스요리만 판매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대학교수는 “연구자들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며 카르텔을 운운했던 사람이 여러 의혹으로 앞뒤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연구자와 관료의 대비되는 상황이 학계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