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NASA(미 항공우주국)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정부가 추진하는 ‘우주항공청’ 설립이 국회의 문턱을 넘었다. 우주항공청 설립의 법적 근거가 마련된 만큼 정부는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우주항공청을 만들고 우주산업 생태계 구축, 국제 협력을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다만 우주항공청 출범까지 전문성과 국제적 감각으로 ‘한국판 NASA’의 문을 열 인재를 확보하고 사천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넘어 국제 교류와 다른 분야의 민간 기업과 협력을 원활하게 할 전략 수립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는 9일 본회의를 열고 우주항공청설립운영특별법(우주항공청법)을 의결했다. 지난해 4월 관련 법안이 발의된지 9개월 만이다. 이재형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우주항공청설립추진단장은 “이제 한국도 우주항공 정책과 연구개발(R&D)을 총괄하는 전담 중앙행정기관을 갖출 수 있게 됐다”며 “선도국들과 경쟁에 참여해 기술 경쟁력을 높이고 산업 발전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우주항공청은 각 정부부처가 나눠 갖고 있는 우주항공 관련 업무를 이관 받아 총괄하는 조직으로 만들어진다. 그간 과기정통부, 산업통상자원부, 국토교통부를 비롯해 여러 부처와 기관이 각자 우주항공 정책을 추진한 결과, 정책 난립으로 우주항공 경쟁력이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우주항공청은 과기정통부 소속의 차관급 기관으로 출범한다. 정부는 법안이 시행되는 5월 말까지 조직 구성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이 단장은 “시행령은 실무적으로 미리 준비를 해뒀고, 우주항공청 직원 정원과 예산 확보가 필요하다”며 “청사 임차도 조속히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다만 우주항공청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 풀어야 할 과제도 여럿 남아 있다. 가장 시급한 건 인력이다. 당장 우주항공청을 이끌 청장 인선부터 해결해야 한다. 국내 첫 우주항공청장으로서 상징성이 큰 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을 선발해야 한다. 일본은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의 다치가와 게이지 초대 청장이 조직을 쇄신하며 성공적으로 일본 우주 개발 정책의 앞길을 닦았고, 아랍에미리트(UAE)는 초대 우주항공 청장에 30대 여성 과학자를 임명하는 파격 인선으로 빠르게 기술 수준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
방효충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는 “한국인 연구자 중 외국에서 좋은 경력을 쌓은 인물이 충분히 많다”며 “다만 현실적인 조건과 대우를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청장뿐 아니라 전문 인력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정부는 우주항공청에 우수 인력을 유치하기 위해 팀장 이상 모든 보직에 민간 전문가를 임기제 공무원으로 채용할 수 있게 했다. 보수 상한도 폐지해 민간 수준의 급여도 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국내에 한정적인 인력 규모다.
과기정통부가 지난달 29일 발표한 ‘2023 우주산업실태조사’에 따르면 2022년 국내 우주분야 인력은 1만125명이다. 이 중 전문가라고 볼 수 있는 박사 학위 소지자는 1853명에 불과하다. 비슷한 경제 수준의 다른 국가에 비하면 다소 모자란 수치라는 평가를 받는다. 과기정통부는 우주항공청의 전체 인력 규모를 300명으로 계획하는 만큼 전문가 인력도 수요도 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안형준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국가우주정책연구센터 팀장은 “우주 분야에서 경험이 많은 우수 인력을 어떻게 확보할지가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평가했다. 방 교수는 “모든 목표를 한번에 달성하기 보다는 점진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주항공청이 자리할 경남 사천의 입지 조건과 정주 여건 개선 문제도 개선해야 한다. 우주항공청은 미 NASA를 벤치마킹한다고 하지만 미국을 비롯해 다른 나라 우주청들이 수도에 설립된 것과 다른 지방을 선택했다. 전문가들은 우주항공청 입지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을 벌인 것도 우수 인력의 확보와 유지, 국제 협력의 위한 환경 확보, IT와 바이오 기술 등 다른 분야의 협력 확대가 원활하지 못한 곳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가 제기되면서 당초 우주항공청법에는 사천의 정주여건 개선 조항이 있었으나 안건조정위원회 논의 과정에서 제외됐다. 법안으로 마련해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지역 환경 개선이 자칫 지지부진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우주 분야의 한 전문가는 “정주여건 부족으로 우수 인력을 확보하지 못해 정부 기관의 기능이 제역할을 하지 못한 사례는 이미 여럿 있었다”며 “정주여건 개선 문제는 경남도와 사천시가 일정부분 책임지고 풀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과 한국천문연구원을 우주항공청에 편입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소속인 두 기관은 기존 법인을 청산한 뒤에 법인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각각 임기가 올해 3월과 4월에 끝나는 이상률 항우연 원장과 박영득 천문연 원장의 거취를 어떻게 결정할 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아직 남은 과제에도 불구하고 과학계와 산업계는 우주항공청 설립이 우주항공 산업 생태계 구축과 기술 경쟁력을 높이는 데 도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방 교수는 “우주 분야에서 공동 연구와 기술 산업화가 시급한 상황”이라며 “우주항공청을 중심으로 속도감 있는 정책 추진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안 팀장은 “우주항공청 설립을 시작으로 국가 우주 거버넌스의 개편이 이뤄질 것”이라며 “외교, 안보, 국방 등 다방면에서 종합적인 정책 추진이 기대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