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다. 의대 쏠림 현상까지 겹치면서 이공계 분야의 인재 공급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인구절벽에 따른 연구인력 부족을 해결할 방법 중 하나가 해외 인재 유치다. 하지만 비영어권 국가인 한국은 여러모로 해외 우수 인재를 데려오기가 쉽지 않다. 해외 인재가 한국에 뿌리를 내리려면 연구 환경과 정주 여건을 개선하고, 문화적인 차이를 극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조선비즈는 한국에 대한 애정으로 바다를 건너 국내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연구자를 소개하는 코너를 마련했다. 이들이 한국을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들어보고 해외 인재 유치 과정에서 마주할 수 밖에 없는 난제를 해결할 아이디어를 얻어본다. [편집자 주]

수평선 끝에서 시작한 물결이 점점 가까워지고 이내 드넓은 백사장에 부딪혀 부서진다. 일렁이는 물결을 보고 한국인들은 ‘파도’를 떠올리지만, 미국인들은 웨이브(wave)를 생각한다. 언어가 품은 의미는 그 사람이 살아온 문화를 보여주는 창이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뇌융합기술연구단에는 신경세포가 만드는 일렁이는 전류 신호에서 파도를 떠올린 과학자가 있다. 흰 피부에 금발을 가진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2011년 처음 한국 땅을 밟은 외국인이다. 한국에서 생활한 지 12년이지만 여전히 한국말보다는 영어가 편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이 개발한 기술에는 웨이브 대신 ‘파도’라는 한글 이름을 붙였다. 한국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 성과에 한글 이름을 붙이는 사례는 종종 찾아볼 수 있으나 외국인 과학자에게서는 낯선 모습이다.

그의 손에서 태어난 것은 파도만이 아니다. 신경과학을 연구하는 베이커 책임연구원은 “봉우리, 소나기, 안팎처럼 여러 기술에 한글 이름을 붙여 발표하고 있다”며 “모두 직접 영감을 받아 지은 이름”이라고 말했다. 그의 주요 연구 분야는 신경 이미징이다. 전기 신호로 조절되는 신경 활동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게 돕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그가 개발해 한글 이름을 붙인 장비들 모두 신경 활동 측정을 돕는 데 사용된다.

지난 11월 14일 서울 성북구 KIST에서 만난 그는 “익숙하지 않은 한글로 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이유는 한국 과학계에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하고 있다”며 “한국에서 이뤄진 연구가 전 세계 과학자들의 입에 계속 오르내릴 수 있도록 연구를 이어가겠다”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브래들리 베이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책임연구원이 지난달 14일 서울 성북 KIST 본원에서 조선비즈와 인터뷰를 갖고 "연구 결과물에 한글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한국 과학계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형광전압센서에 '파도' '봉우리' '소나기' 같은 한글 이름을 붙이고 있다./한국과학기술연구원

-2011년 한국 생활을 시작해 아직도 지내고 있다. 어떤 계기로 한국행을 결심했나.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미생물학을 전공했고,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생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예일대에서 연구조교수로 지내던 중 KIST에서 제안을 받았다. 당시 KIST에서는 ‘세계적 수준의 연구센터(WCI)’ 사업을 하면서 해외의 과학자들을 초빙하던 시기다. 그 프로그램으로 한국에 자리 잡게 됐고 벌써 12년이 지났다.”

-이미 세계적인 연구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 같다.

“나만의 연구실을 갖고 싶었던 시기에 마침 제안이 왔다. 물론 고민도 많았다. 한국에 가본 적도 없고 어떤 곳인지도 몰랐다. 한국으로 향하던 비행기에서도 ‘내가 지금 왜 한국에 가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국에 직접 와보니 생각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한국 연구자들은 에너지가 넘치고 연구 환경도 좋았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는 어떤 연구를 하고 있나.

“우리 몸은 신경계의 활동을 통해 제어된다. 신경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눈으로 볼 수 있는 ‘형광 이미징’을 연구하고 있다. 신경계는 기본적으로 전기 시스템이다. 눈으로는 볼 수 없고 전압 변화를 측정해 신경의 활성을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이 방식은 너무 번거롭다. 반면 빛을 이용하면 굉장히 쉬워진다. 신호 흐름에 따라 신경세포의 단백질이 빛을 내게 하는 방식이다.”

-자랑할 만한 연구 성과는 무엇인가.

“뇌 활동을 눈으로 볼 수 있는 ‘형광전압센서’가 대표적이다. 단백질이 전압 변화를 감지할 수 있게 하고 그에 따라 형광을 내는 반응을 이용했다. 여기에 디옥시리보핵산(DNA)을 붙여 특정 세포에서만 특이적인 관찰도 가능하게 했다. 최근에는 해파리에서 발견한 형광 단백질을 변형해 산성도(pH)나 전압 변화를 볼 수 있게 하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단순히 기술 개발만이 아니라 이를 활용한 연구도 하고 있다. 이제까지는 신경세포의 전류 흐름이 표면에서만 일어난다고 알려졌으나 우리 기술을 이용해 세포 내부에 있는 소포체에서도 전압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브래들리 베이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책임연구원이 개발한 형광전압센서 '파도'로 인간 배아 신장세포(왼쪽)의 신경 활성을 측정한 결과. 그래프 파형이 마치 파도가 치는 것처럼 나타나 이같은 이름을 붙였다./한국과학기술연구원

-직접 개발한 형광전압센서에 특이한 이름을 붙였다.

“센서에 파도, 봉우리, 소나기, 안팎 같은 이름을 붙여 학계에 소개했다. 센서에서 측정되는 파형에서 영감을 얻어 붙인 이름이다. 가령 봉우리는 파형을 거꾸로 뒤집으면 산봉우리처럼 보인다. 파도는 일렁이는 파도 같은 모습이다. 소나기는 신경세포 활성을 측정하는 반응 속도가 소나기처럼 빠르다는 의미에서 따왔다. 가장 어려웠던 건 안팎이었다. 세포를 둘러싼 세포막의 두께에 따라 작동하거나 작동하지 못하는 센서다.”

-과학계 표준 언어는 영어다. 굳이 한글 이름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 한국으로 오던 비행기에서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이전까지는 내 자신의 만족을 위해 연구했으나 한국에서는 뜻깊은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또 한국 과학계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기도 하다. 한글 이름을 붙이면 내 연구가 한국에서 이뤄졌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릴 수 있다. 한국어가 미숙하지만 나름 창의력을 발휘해 이름을 짓고 있다.”

-한글 이름을 붙인다길래 한국어에 능숙한 줄 알았다. 한국말 실력은 어떤가.

“안타깝게도 한국 생활에서 가장 큰 장벽으로 남아 있다. 여전히 한국말은 어렵다. 강연에서 만난 한 학생이 내 한국어 발음을 듣고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아마 내가 한국말을 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한국어 실력을 듣고 실망했던 것 같다.”

-형광전압센서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의 세포에서 시작해 여러 개의 세포, 신경 전체로 단계적으로 지식을 확대해 나갈 수 있다. 가령 내가 컵을 잡기 위해 손을 뻗으면 근육 신경을 활성화하는 동시에 원하지 않는 행동은 억제하는 신경 활동이 일어난다. 활성과 억제라는 균형을 잘 유지해야 건강한 신체 활동이 가능하다. 반면 신경질환을 앓는 사람들은 그 균형이 무너져 있다. 파킨슨병 환자는 신경 억제가 우세해서 운동 장애를 겪는다. 이를 해결하려면 작은 단위에서 일어나는 신경 활동의 이해가 필요하다.”

─세포 수준에서 신경 활동을 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의 세포에서 시작해 여러개의 세포, 신경 전체로 단계적으로 지식을 확대해 나갈 수 있다. 가령 내가 컵을 잡기 위해 손을 뻗으면 근육 신경을 활성화하는 동시에 원하지 않는 행동은 억제하는 신경 활동이 일어난다. 활성과 억제라는 균형을 잘 유지해야 건강한 신체 활동이 가능하다. 반면 신경질환을 앓는 사람들은 그 균형이 무너져 있다. 파킨슨병 환자는 신경 억제가 우세해서 운동 장애를 겪는다. 이를 해결하려면 작은 단위에서 일어나는 신경 활동의 이해가 필요하다.”

파도로 측정한 세포의 전압(파란색)과 산성도(빨간색) 변화. 각 사진 아래 숫자는 밀리초(㎳·1밀리초는 1000분의 1초)를 의미한다./한국과학기술연구원

-신경질환 정복을 위한 연구라는 의미인가.

“우리 연구의 최종 목표 중 하나가 질병 정복이다. 실제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하기 전에는 미국 메이요클리닉에서 신경질환을 연구하는 켄들 리 연구원과 공동 연구도 했다. 그는 신경계에 전극을 꽂고 전기 자극을 해 신경 활성을 조절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우리가 개발한 센서로 전기 자극을 하는 동안 신경 활성을 관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일종의 연구 플랫폼(기반 기술)이라는 것인가.

“실제로 여러 연구진과 협력도 하고 있다. 서울대 연구진과는 망막 세포의 활동을 영상화하기 위한 연구를 같이하고 있다. 실명 환자에게 망막 이식으로 시력을 회복시켜주려는 시도가 있는데 그 과정에서 망막 세포의 활동을 영상화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우리가 가진 기술의 장점은 다양한 분야에 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한국 생활을 오래 했다. 그동안 느낀 한국 과학계는 어떤 곳인가.

“한국 과학자들은 ‘헝그리’하다. 항상 고군분투하고 있고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있다. 예일대에서 봤던 그 어떤 국가의 과학자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있다. 변화에 빠르고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도 강점이다. 알파고가 세상을 놀라게 한 ‘알파고 쇼크’ 당시 한국 과학자들은 앞으로 인공지능(AI)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 빠르게 연구를 시작했다. AI 프로젝트도 많이 시작됐다.”

-한국이 더 많은 해외 과학자를 영입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내가 한국행을 선택했을 당시 고민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처음에는 5년 계약직을 제안받았다. 그러나 과학자에게 5년은 너무 짧은 시간이다. 학생들을 교육해야 하고 본격적인 연구를 준비하면 끝나는 시간이다. 나는 당시 ‘한국은 왜 내가 5년 뒤에 떠나길 바라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아마 외국인들이 한국에 정착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한국의 연구 환경은 훌륭하고 생산성도 높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이루고 싶은 최종 목표는.

“과학자로서 뛰어난 연구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내 멘토인 로렌스 코헨 박사를 닮고 싶다. KIST에서 일하던 외국인 과학자로 올해 별세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지식과 연구 자원을 다른 연구자들에게 항상 베풀던 사람이다. 나 역시도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앞으로 내가 개발한 센서를 다른 과학자들이 필요한 곳에 쓸 수 있도록 나누고 싶다.”

브래들리 베이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책임연구원은

1989년 미국 인디애나대 미생물학과 학사

1998년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생화학 박사

1999년 미국 예일대 박사후연구원

2002년 미국 예일대 연구조교수

2011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책임연구원


주요 연구성과

Scientific Reports(2016), DOI: DOI: https://doi.org/10.1038/srep23865

Journal of Neuroscience(2015), DOI: https://doi.org/10.1523/JNEUROSCI.3008-14.2015

Scientific Reports(2018), DOI: https://doi.org/10.1038/s41598-018-250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