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개봉한 영화 ‘쥬라기 공원’은 과거 지구를 지배했지만 지금은 멸종한 공룡을 현대 생명과학 기술로 되살려 낸다는 파격적인 설정으로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영화에서는 호박에 갇혀 있던 모기의 피에서 공룡 DNA를 찾아낸 뒤에 개구리 DNA를 잘라 붙이는 방식으로 공룡을 되살렸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영화 속 이야기는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 SF영화 속 꿈 같던 기술이 30년이 지난 지금은 현실을 바꾸고 있다. 유전자 가위라는 유전자 교정 기술로 생산성을 높이고 질병에 대한 적응력을 높인 작물이 미국과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다. 난치병 치료제도 조만간 시장에 나올 것으로 보인다. 한국도 유전자 가위 기술의 선두를 달리는 국가다. 하지만 미국이나 일본 같은 경쟁국에 비해 과도한 규제 탓에 상업화는 늦어지고 있다. 조선비즈는 6회에 걸친 기획을 통해 유전자가위 기술의 현재와 가능성을 짚어보고, 규제 개선 방향을 제시하려고 한다.[편집자 주]

최성화 지플러스생명과학 대표(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가 이달 8일 충북 오송생명과학단지에 있는 온실에서 비타민D 토마토를 소개하고 있다. 지플러스생명과학은 유전자가위 기술을 이용해 일반적인 토마토에는 없는 비타민을 함유한 새로운 종자를 개발했다./오송=이병철 기자

“입장 전에 외투를 벗고 실험복으로 갈아 입어야 합니다. 외부에서 들어 온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의해 내부가 오염될 수 있기 때문이죠. 이 안에는 특별한 토마토가 자라고 있어 작은 오염원이라도 조심해야 합니다.”

찬 바람이 불던 지난 8일, 충북 오송생명과학단지에 있는 지플러스생명과학 온실에 들어서자 더운 공기와 함께 진한 풀 냄새가 풍겼다. 온실 바깥과 달리 봄이 찾아온 듯한 날씨였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인 최성화 지플러스생명과학 대표의 안내에 따라 옷을 갈아 입고 온실로 들어서자 줄지어 자라고 있는 토마토가 한눈에 들어왔다. 무릎 정도 높이로 자란 토마토에는 발갛게 열매가 익어가고 있었다.

토마토가 자란 줄 맨 앞에는 이름표도 붙어 있었다. ‘프로비타민 D3′라는 단어와 함께 숫자 3개가 연달아 적혀 있었다. 최 대표는 “여기서 자라는 토마토는 조금은 특별하다”며 “유전자 편집으로 일반적인 토마토에는 없는 비타민D를 함유해 하나만 먹더라도 하루 필요량을 섭취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일반적인 토마토에서 만들어지는 비타민D의 재료인 프로비타민D는 콜레스테롤로 바뀐다. 지플러스생명과학은 이 경로를 막아 비타민D 형태로 축적되도록 새 품종을 만든 것이다. 칼슘 대사를 조절하는 비타민D는 뼈의 건강과 면역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영양소다. 영양제로 먹는 비타민D는 주로 양털에서 추출해 만들어진 동물성이라 사람이 먹더라도 흡수율이 낮다. 반면 식물에서 만들어진 식물성 비타민D는 빠르게 흡수돼 영양 효율이 높다.

지플러스생명과학 온실에서 자라고 있는 비타민D 토마토. 비타민D의 원료가 되는 프로비타민D를 콜레스테롤로 바꾸는 경로를 막아 만들어졌다./오송=이병철 기자

‘비타민D 토마토’가 시장에 출시되면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전 세계 토마토 시장은 가공품을 포함해 200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재배도 쉽고 다양한 가공품의 재료로 토마토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종자 산업은 전체 토마토 시장의 1%를 차지해 2조원 규모에 달한다. 고부가가치를 가진 종자가 나오면 그만큼 시장 파급력도 크다는 이야기다.

최 대표는 “이미 일본에서 가바(GABA) 함량이 높은 토마토가 출시돼 판매가 이뤄지고 있다”며 “이 토마토를 개발한 사나텍시드에 따르면 소비자들도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유전자가위 기술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특성을 가진 종자의 개발이 농업 시장의 판도를 바꿀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세균이 바이러스의 DNA를 잘라 스스로를 보호하는 ‘크리스퍼’ 시스템을 이용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기술이 나오면서 그 속도는 점차 빨라지고 있다. 프로비타민D를 콜레스테롤로 바꾸는 유전자를 잘라 새로운 특성을 갖게 하는 방식이다.

한지학 툴젠 종자사업본부장은 “새로운 종자를 만드는 육종이 체계적으로 이뤄진 시기는 약 100년 정도로 이 기간 여러 기술이 결합되면서 고부가가치를 가진 품종이 나오기 시작했다”며 “유전자가위 기술을 활용해 원하는 유전자를 정확하고 안전하게 편집할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운 종자가 앞으로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지플러스생명과학은 이런 추세에 힘입어 토마토뿐 아니라 상추, 파프리카, 감자 같은 다른 작물도 개발할 계획이다. 현재 비타민D 토마토는 개발이 완료됐고, 여러 차례 세대를 거치면서 특성이 유지되는지, 더 균일한 품질의 종자를 만들기 위한 단계에 와 있다. 최 대표는 “글로벌 종자 기업과 비타민D 토마토 종자의 라이센싱 아웃 계약을 의논하고 있다”며 “세계 시장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외에서도 러브콜을 보낼 정도로 비타민D 토마토는 혁신적인 기술이지만, 정작 국내 소비자들은 이 토마토를 맛볼 기회가 없다. 국내에서는 비타민D 토마토 같은 유전자 편집 종자는 연구만 가능하고, 판매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유전자 편집 종자를 육성하고 있는데, 한국은 제대로 된 법 체계나 규제가 없어서 기술을 가지고도 산업을 키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픽=정서희

전 세계 대부분 국가에서는 유전자 편집 종자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지원 방안을 내놓고, 규제를 풀어주고 있다. 남미 대부분 국가와 미국, 중국, 러시아를 비롯해 농업 시장의 규모가 큰 나라들은 유전자 편집 종자를 GMO가 아니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들 국가에서는 유전자 편집 종자가 GMO에 적용되는 인체·환경유해성 평가를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재배와 판매도 가능하다. 현재 주요국 중 유전자 편집 종자를 GMO로 분류하는 곳은 뉴질랜드가 유일하다.

반면 한국은 ‘회색 지대’에 속한다. 제대로 된 규제안도 마련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유전자 편집 종자를 어떻게 분류할 지에 대한 법 개정안이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 계류돼 있으나 통과 여부도 미지수다. 개정안에 따르면 국내에서 유전자 편집 종자는 GMO로 분류될 예정이다. 다만 사전검토를 통해 전통육종이나 자연적 변이 수준의 안전성이 확인되면 위해성심사나 수입·생산·이용 승인을 면제하는 방식이다.

언뜻보면 국내에서도 유전자 편집 종자 사업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만 업계에서는 이런 방식으로는 세계적인 수준의 유전자 편집 종자 산업 육성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한 본부장은 “GMO 수준의 규제를 면제하더라도 현재 개정안으로는 상업 재배가 불가능하다”며 “GMO와 마찬가지로 격리실에서만 재배할 수 있는데 국내에는 실험용으로 일부 대학만이 갖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새로운 종자가 개발되면 농가에서 시험 재배가 이뤄져야 한다. 국내에서도 어느 지역에서 잘 자라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유전자 편집 종자를 GMO로 분류한다면 일반 농가에서는 씨앗을 심지도 못한다. 당연히 상업 재배는 불가능하다.

국내 종자 기업들은 ‘유전자 교정(GE) 협의회’를 만들어 정부에 유전자 교정 종자를 GMO와 별개로 분류해 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최 대표도 “한국은 농업 기술에 지금까지 1조원 가량을 투자했으나 상용화로 이어진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며 “농업 기술에 대한 규제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지현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생명기초사업센터 연구위원은 “농업 산업에서 기술의 중요성은 커지고 있지만, 국내 종자 기업 중 유전자 편집을 연구하는 곳이 많지 않지 않은 상황”이라며 “단순히 규제 문제뿐 아니라 내수 산업을 육성할 정책도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