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니는 날개가 없는 흡혈 기생충으로, 인간에 사는 종은 오직 인간에만 기생한다. 과학자들은 전 세계 머릿니의 DNA를 분석해 인간의 이주 경로를 확인했다./미 질병통제예방센터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으로나 알던 빈대가 전국에 출몰하고 있다. 인류가 출현하면서 시작된 흡혈 기생충과의 악연(惡緣)이 21세기까지 이어졌다. 과학자들은 악착같이 인간에 들러붙는 기생충을 이용해 인류의 역사를 추적하고 있다. 머릿니로 유럽인의 아메리카 이주를 추적하고, 바이킹의 몸속에 있는 편충으로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인류의 이동을 확인했다. 고인류의 화석이 없어도 기생충 흔적만 있으면 인류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머릿니 통해 아메리카 이주사 재구성

미국 플로리다대의 데이비드 리드(David Reed) 교수 연구진은 지난 8일 국제 학술지 '플로스 원(PLoS ONE)'에 "전 세계에서 채집한 머릿니(학명 Pediculus humanus)의 DNA를 분석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인류가 이주한 두 가지 경로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머릿니는 날개가 없고 숙주의 두피를 뚫고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이다. 머릿니는 숙주마다 다르다. 사람에 기생하는 머릿니는 오직 사람 두피에만 산다. 사람이 만나면 머릿니도 옮겨갈 수 있다. 머릿니를 통해 사람들이 만나고 이동한 경로를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리드 교수와 미국 농무부 농업연구소의 마리나 에스컨스(Marina Ascunce) 박사는 온두라스와 프랑스, 르완다, 몽골 등 전 세계 25개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서 머릿니 274마리를 채집했다. 앞서 연구진은 머릿니의 세포핵에 있는 DNA를 분석했다. 그 결과 유전적 연관성이 있는 두 집단이 확인됐다. 한쪽은 아시아와 중앙아메리카의 머릿니였고, 유럽과 아메리카의 머릿니가 다른 집단을 이뤘다.

사람 머리카락을 붙잡고 있는 머릿니의 전자현미경 사진./웰컴 트러스트

DNA는 시간이 가면서 일정한 속도로 돌연변이가 발생한다. 연구진은 머릿니 DNA의 돌연변이 역추적해 언제 서로 다른 지역의 머릿니 사이에 교잡이 이뤄졌는지 추적했다. 연구진은 온두라스와 몽골의 머릿니가 유전적으로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것은 2만3000년 전에 아시아계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퍼지면서 머릿니도 함께 퍼졌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연구진은 유럽과 미국, 멕시코, 아르헨티나의 머릿니들의 유전적 연관성도 확인했다. 돌연변이를 역추적했더니 약 500년 전 아메리카 원주민의 머릿니와 유럽인의 머릿니가 교잡했을 것으로 추정됐다.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머릿니도 함께 퍼진 것이다.

덴마크 코펜하겐대의 미켈 빈터 페데르센(Mikkel Winther Pedersen) 교수는 사이언스지 인터뷰에서 "인간의 DNA가 고고학 유물이 없는 상태에서 머릿니가 인간의 이동과 상호 작용에 대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페레르센 교수는 인간 숙주는 피를 나누지 않아도 머릿니끼리는 교잡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람이 함께 모여 상품을 거래했지만 혼인 관계는 맺지 않은 사례도 찾을 수 있다고 밝혔다.

영국 레딩대의 알레한드라 페로티(Alejandra Perotti) 교수는 이번 연구가 흥미롭지만, 머릿니의 채집 지역이 다양하지 않다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아프리카에서 잡은 머릿니는 한 마리밖에 없었고 남미의 머릿니도 적어 전 세계에서 머릿니가 어떻게 연관됐는지 추론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또 머릿니의 DNA 중 극히 일부만 해독한 점도 아쉬운 부분으로 지적됐다. 연구진은 곧 머릿니의 전체 유전자를 해독하겠다고 밝혔다.

바이킹 유적지에서 나온 분변 화석 속의 5000년 된 편충 알들./Nature

◇빈대, 편충 통해 인류사 추적하기도

기생충과 인간의 만남을 DNA를 통해 역추적한 연구는 이전에도 있었다. 앞서 2019년 독일 드레스덴 공대 연구진은 전 세계에서 채집한 빈대의 DNA를 해독해 빈대가 인간으로 옮겨온 두 가지 경로를 확인했다. 50만년마다 새로운 빈대 종이 출현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동안 빈대가 6400만년 전 포유류로는 박쥐에 처음으로 기생했다고 알려졌는데, 당시 연구로 공룡시대인 1억1500만년까지 역사가 확장됐다. 연구진은 독수리에 기생하는 한 빈대가 인간을 숙주로 바꿨고, 다른 빈대는 박쥐에 기생하다가 전 세계적으로 비료로 쓰기 위해 박쥐 배설물 채취가 늘면서 역시 인간에 옮겨왔음을 확인했다.

덴마크 코펜하겐대 연구진은 지난해 인간의 몸속에 있는 기생충을 통해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할 때 기생충도 함께 퍼져나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연구진은 바이킹 정착지에서 나온 분변 화석에서 5000년 된 편충(학명 Trichuris trichiura)의 알을 찾아내 유전자를 분석했다. 이를 아프리카와 중앙아메리카, 아시아, 유럽 9개 지역에서 얻은 오늘날 편충과 비교해 1만 년간 편충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변화를 살폈다. 세포핵 밖에 있는 미토콘드리아 DNA는 모계로만 유전돼 진화 과정을 추적하는 단서로 쓰인다.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에 발표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아프리카에 있던 편충이 아시아, 아메리카 지역으로 차례로 이동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현생 인류가 세계로 퍼져나간 방향과 일치한다. 연구진은 5만5000년 전 현생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이주할 때 편충도 함께 전파됐다는 결론을 얻었다.

편충은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가장 오래된 기생충 중 하나로, 인간 면역체계와 장내 미생물군을 자극해 숙주와 기생충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고 알려졌다. 따라서 건강한 사람에게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만, 영양실조가 있거나 면역체계가 손상된 사람에게는 심각한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

참고 자료

PLoS ONE(2023), DOI: https://doi.org/10.1371/journal.pone.0293409

Nature Communications(2022), DOI: https://doi.org/10.1038/s41467-022-31487-x

Current Biology(2019), DOI: https://doi.org/10.1016/j.cub.2019.04.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