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과학자가 내일의 과학자를 만나다’
10월의 마지막 주말인 지난 28일 경북 경산시의 경상북도교육청정보센터. 정오를 지나자 많은 이날 지하 1층에서 열리는 강연을 듣기 위해 사람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백발의 노인부터 앳된 얼굴의 초등학생까지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이 행사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도서관 입구에 걸린 현수막 앞에서는 “아, 이 양반이구먼”하는 구성진 사투리도 들려왔다.
이날 행사는 과학자들이 지역 청소년과 일반인을 찾아가는 대중과학 강연인 ‘10월의 하늘’로, 경산을 비롯해 전국 50개 도서관에서 일제히 열렸다. 정재승 KAIST 뇌인지과학과 교수가 2010년 처음 시작한 행사는 매년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마다 100명의 과학자가 1만명의 지역 청소년과 주민들을 찾아가는 방식의 재능기부 강연이다. 14년째 이어질 만큼 재능기부 참여도, 강연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도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
강연을 20분 정도 앞둔 시각, 이미 TV와 각종 도서를 통해 정 교수를 익히 알고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정 교수가 강연장으로 들어서자 책에 사인을 받으려는 학생들로 행사장에는 금새 긴 줄이 늘어섰다. 이날 행사장을 찾은 박서영(경산 사동초 4년)양은 “유명한 과학자가 나온 과학 강연은 처음이라 설렌다”고 했다.
정 교수는 이날 본격적인 강연에 앞서 “2005년 우연히 서산시립도서관에서 했던 강연의 반응이 ‘BTS 급’으로 너무 좋았다”며 “서산에 과학자가 한 번도 온 적이 없다는 말을 듣고 한동안 방학마다 이 지역에서 소박한 강연을 열다가 이를 전국으로 확산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강연장에는 과학에 대한 꿈을 가진 어린이, 청소년뿐 아니라 성인들 100명이 자리 잡았다.
정 교수는 이날 ‘인공지능(AI) 로봇은 언제쯤 우리 곁에 오나’라는 주제를 스크린에 띄우면서 강연을 시작했다. 정 교수는 능숙하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질문에 대답만 하면 책을 선물로 주겠다”며 청중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어 “로봇을 직접 본 적이 있냐”는 질문도 던졌다. 너도나도 손을 들어 로봇에 대한 기억을 발표했다.
정 교수는 너댓 명의 답을 듣고 곧이어 ‘로봇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꺼냈다. 정 교수는 로봇의 3원칙이라는 조건으로 움직여야 하고, 똑똑하며, 세상과 주변, 환경, 사람과 상호작용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그런점에서 “핸들로 조종하는 일반 자동차는 로봇이 아니지만, 자율주행 자동차는 로봇”이라며 “구글의 완전자율주행차 ‘웨이모’와 테슬라의 자율주행차, 수술 로봇”을 소개했다.
정 교수는 사람을 닮은 로봇인 ‘휴머노이드’를 예로 들며 로봇과 AI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인간을 대체하기 위해 만든 휴머노이드 로봇이 식당과 공장은 물론 재난 상황에도 투입되기 위해서는 문을 열거나 밸브를 잠그는 등 인간의 작업을 그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가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다’며 스크린에 현재 세계 회사들이 만들고 있는 휴머노이드 로봇의 영상을 띄우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로봇이 밸브를 잡으러 가다 넘어지거나 골문 앞에서 공을 막으려다 넘어지는 모습 때문이었다. 정 교수는 “현재 로봇은 인간의 모습을 구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을뿐더러 가사 노동을 할 수 있는 로봇을 집에 들이기 위해서는 한 달에 300만원 이상이 든다”며 “이를 낮추는 작업이 진행돼야 로봇이 보편화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로봇이 사람이나 동물의 몸으로 들어가거나 뇌와 상호작용하는 ‘뇌기계 인터페이스(BMI)’의 미래를 이야기할 땐 청중들도 숨을 죽였다.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가 세운 뉴럴링크 뇌에 컴퓨터 칩을 심은 원숭이가 생각만으로 비디오 게임을 하는 영상을 공개했다. 정 교수는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원숭이에게 다리를 대신할 로봇을 장착해 두고, 원숭이가 ‘걷고 싶다’라는 생각을 뇌파로 감지해 생각만으로 로봇을 조종할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자신의 연구실에서도 사람의 생각만으로 로봇이 미로를 통과하게 하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정 교수는 “실험 100번 중에 93번은 로봇이 벽에 스치지도 않고 목적지까지 가는 데 성공했다”며 “팔에 장애를 가진 청소년을 대상으로 생각대로 움직이는 의수를 제작해 일상의 불편함을 덜 수 있도록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강연 후반 “어렸을 때 로봇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저런 로봇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뇌과학자가 되어 생각만으로 로봇을 조종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며 “이 강연을 들은 어린이, 청소년 중에서도 자신이 상상한 것을 반드시 만들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달라”고 전했다.
정 교수는 ‘어디서 연구의 아이디어를 얻냐’는 한 초등생의 질문에 “오히려 과학 영역 바깥에서 아이디어들을 얻는다”며 “과학자들이 세상에 나가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그는 ‘언제쯤 우리 생활에 인공지능을 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미 생활 곳곳에 인공지능이 쓰이고 있다”며 “로봇과 사람이 공생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면 인공지능 로봇들도 생활 곳곳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참가자들은 이번 강연을 계기로 대부분 과학에 대해 더 흥미를 갖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박승현(대구 동호초 5년) 군은 “평소에도 생명과학 분야에 관심이 많았는데 오늘 강연으로 과학에 대해 더 관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평소 로봇에 관심 많았다던 경산에 사는 42세 한 회사원도 “AI가 널리 쓰이는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고 강연에 참여했는데, AI 로봇이 생활을 편하게, 행복하게 하는데 어떤 역할을 할지 엿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지금까지 14년째 행사가 이어져 오는 힘은 ‘10월의 마지막 토요일’을 기다려 온 재능 기부자들 덕분”이라며 “자발적인 참여가 가장 폭발적인 열정을 만들어낸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10월의 하늘 행사를 접한 어린이와 청소년, 시민 중 누군가는 과학자와 공학자가 되어 다음 세대에게 10월의 하늘 강연을 되돌려 주었으면 한다”며 “근사한 내일의 과학자가 되어 모레의 과학자들을 만나주길 바란다”고 밝혔다.